흐르기 위해서
진영은 만 30세의 취업 준비생이다. 공장을 운영하는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진영은 일상을 벗어나고자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가 않다. 여기에 예기치 못한 사건이 다가오고, 어머니의 부재로 인한 혼란은 진영의 발길을 붙박아둔다. 진영의 바람이 어떻게 되어가든 시간은 버겁게 흘러가고, 진영은 삶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만의 답을 찾으려고 애쓴다.
<흐르다>의 탁월한 지점들 중 하나는 삶을 이루는 공기의 밀도까지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현실적인 세심함에 있다. 이 작품 특유의 리얼리티에는 기묘하게 실무적인 면모가 있어 잔인하면서도 어쩐지 황당하기까지 하다. 영화는 삶의 고단함을 전달하기 위해서 쇼트를 과열시키는 대신 이러한 리얼리티를 끌고 들어와 관객을 진영의 삶의 한편으로 온전히 몰입하게끔 돕는다.
세상을 살아내는 일이 너무 어려워서, 그래서 그나마 고생을 좀 덜 해보려고 사람들은 다양한 처세술을 이용한다. 그들은 적당히 모른 척을 하면서, 일일이 마음 쓰지 말고 영리하게 굴라고 한다. 그런 매정하고 현명한 방법들을 익히다 보면 정말로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기도 해서 이게 정말로 세상을 잘 살아내는 방법이었나 싶은 생각에 때로 씁쓸해지곤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 혹은 잊을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걸 번뜩 깨닫게 된다. <흐르다>는 삶의 이러한 지난한 깨달음의 과정을 압축해 드러내는 극처럼 여겨진다. 영화가 두 시간 내내 공을 들여 인물들에게 꼼꼼하게 새겨내는 생채기들이 종국에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곪았던 문제들이 지저분하게 터져버린 뒤에 인물들은 각자 어떤 선택을 하는지를 부디 한 번쯤 지켜봐주시기를 권하고 싶다.
시끄러운 소음으로 꽉 찬 공장가를 버석한 얼굴로 걸어가던 진영의 모습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다. 이처럼 영화 속에는 진영이 길을 걷는 장면들이 여럿 있다. 길 위의 진영을 가만히 떠올리면서 모든 것이 항상 유려하게만은 흐르지 않는다는 걸 문득 깨닫는다. 어딘가에 부딪혀 사납고 거칠게 몰아칠 때도 있고, 언뜻 너무나 고요해서 그저 멈춰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는 걸 다시금 상기시켜봤다.
- 오오극장 관객프로그래머 김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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