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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작 프리뷰

<경미의 세계> 프리뷰 - 언어가 끝난 자리

 

언어가 끝난 자리

 

당연히 언어는 영화보다는 문학에 어울린다. 또한 비언어적인 이미지로 작동되는 영화는 언어를 가져올 수 있는 반면, 문학은 이미지를 가져올 수 없다. 근래의 한국문학에서 내게 가장 인상적인 요소는 여성의 식이장애와 관련된 것들이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부터, 현호정의 <연필 샌드위치>까지. 대부분의 이와 관련된 문학들은 자신과 세상사이의 어떠한 심적인 괴리로부터 자신의 신체가 제 기능을 발하지 못하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경미의 세계>의 수연(김미주)은 식이장애라기보다는 자신의 의지로 음식을 게워내는 자이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통제할 수단이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한 수연은 구토한다. 여기서 수연이 자신을 통제하는 행위는 <경미의 세계>에 있어 또 다른 형태로 발산된다. 수연은 상상한다. 수연은 자신의 신체뿐만 아니라, 세상을 자신의 형태로 지어내며 통제하려는 것이다.

 

<경미의 세계>는 실종된 경미(박희경)를 두고 그녀의 어머니인 영순(이영란), 딸인 수연이 경미가 떠난 진실을 놓고 대립하는 이야기이다. 이야기에서 암시하듯 영화의 가장 주된 부분도 영순과 수연이 대립하는 대화 장면들처럼 보인다. 두 인물이 맞부딪힐 때 어떠한 오버 더 숄더 쇼트 없이 각자의 프레임에서 발화하는 얼굴과 몸을 정서의 흐름에 따라 카메라의 위치를 옮겨가며 찍는데 이와 같은 구성은 극영화라면 종종 볼 수 있는 쇼트들의 배치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영순과 수연의 직업이다. 영순은 지금은 요양원에서 누워있을지언정 소설가였으며, 수연은 -단편영화도 찍는다고 하지만-현재 연극을 준비하는 배우이다. 두 사람이 싸울 때 선택하는 언어의 문학성은 여기서 발생한다. 일상적인 화법에서 벗어나, 문학의 화법을 취했기에 영순과 수연은 기존의 문학들처럼 언어들로 관계의 심연에 들어갈 수 있다. 그 심연은 일상의 언어들로 포착하기에는 불가능하기보다는, 문학의 언어가 훨씬 더 잘 담아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발화하는 배우들의 운동성과, 그 미세함을 포착하는 카메라의 위치는 이러한 심연의 영역에서는 어느 순간 뒤로 물러나고 만다. 두 사람의 관계의 깊이에서는 문학의 언어를 이미지로 설득하는데 영화의 비언어성이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듯 중요한 것처럼 보이는 영순과 수연의 대립은 실제로 일어났던 것일까. 앞서 말했듯 수연이 보는 것은 상상에 불과하다는 가능성이 어느 순간 우리를 잠식한다. 영순과의 관계를 제외하고도 수연은 한사람(혹은 한 영화)이 겪기엔 너무 많은, 혹은 우연적인 사건들을 동일한 시간대에 겪는다. 우리는 어느 순간 그 이미지들의 혼란 속에서 길을 잃는다. 내게 인상적인 지점은 수연이 영순과 함께 있는 순간이 아닌, 혼자서, 그리고 타인들과 함께 있는 순간들이다. 그 순간들에서 문학의 언어는 표출될 기회들조차 만들어지지 못하며, 수연은 자신의 언어를 (표출할 대상이 없기에)반강제적으로 잃는다. 그 곳에선 폐허라는 이미지가 언어를 대체한다.

 

 

- 오오극장 관객프로그래머 류승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