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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작 프리뷰

<풀> 프리뷰 - 교집합으로서의 정체성

 

교집합으로서의 정체성

 

 

 대마를 상상할 때, 우리는 무언가 부적절하게 느껴질 것이다. 대마는 대한민국에서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대마를 이미지로 소비하는 것 또한 어딘가 부적절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풀>은 대마에 관한 영화이다. 영화는 국가적인 금지에 반하여 대마를 소비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판단하지 않은 채 사려 깊게 그들의 이야기를 듣지만, 그 시작은 대마에 관해 우리가 현실에서 느낄 법한 금지된 감각을 상기한다.

 <풀>의 초반 장면, 대마와 관련해 부정적인 보도를 하는 뉴스 소리가 들려온다. 이후 대마를 사용한 혐의로 법적 선고를 받은 용현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우리는 용현이 어떤 인물인지, 어떻게 대마를 사용했는지 인지하기 전 그를 법을 어긴 범죄자의 모습으로 처음 보게 된다. 법적인 잘못을 지었다는 죄인이라는 면에서, 우리는 용현이라는 인물에 대해 일정 거리를 두게 되며, 한동안 그에게 이입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시작 이후 <풀>은 이러한 죄에 대한 감각을 완화하려 한다. 용현을 비롯한 대마를 소비하는 여러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일상을 담으며 <풀>은 국가적인 죄의식을 정화하는데 온 힘을 바친다. 그러나 여전히 영화 속 대마의 소비자들과 우리의 거리는 남아있다. 이수정 감독은 소비자들의 삶에 너무 깊게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풀>은 의도적으로 인물들을 스케치하는 데서 그친다.

 그렇다면 <풀>은 무엇을 더 깊게 파고 들까? 다시 말해 <풀>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영화는 종종-문자 그대로의-편지를 보내는 형식을 취한다. 그 편지의 수신자는 대마이다. <풀>은 대마에게 편지를 보내며 그와 관련해 궁금한 것을 묻는다. 편지를 보냄으로써 화면에 대마가 잡히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풍경으로만 기능하지 않는다. 대마는 주인공으로 기능한다.

 <풀>이 놀라운 지점은 주인공을 담는 방식에 있다. 대마는 그 자신으로서만 제시되기도 하지만, 종종 다른 풀과 함께 잡히기도 한다. 다른 풀과 함께 잡힐 때 우리는 대마를 식별하는데 곤혹을 치르기도 하며, 알고 보니 그 풀에 대마가 없었다는 걸 발견하기도 한다. 영화에서 대마는 풀과 함께 어우러지며, 풀이라는 교집합 안에 포함된다. 대마는 그 자신으로서 다른 풀과 구분될 수 있을지 언정, 궁극적으로 풀이라는 하나의 의미로 귀결되는 것이다.

 그러나 풀로 규정되는 대마는 그 정체가 여전히 모호하다. 역설적으로 교집합으로서의 정체성을 획득하지만, 그 자신의 정체성은 획득하지 못한다. 영화는 대마의 이러한 모호한 정체성을 의식한다. 그렇기에 <풀>은 계속 정체성을 묻는 편지를 보낸다. 대마의 누구인지 알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더 알고자 하는 순간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함이 그것을 가로막는다. <풀>의 편지는 그렇게 실패한다. 그러나 이것은 영화적인 실패와는 무관하다. <풀>은 거대한 장벽 아래서 대상의 정체를 어디까지 알 수 있는가의 한계까지 도달하는데 성공한다.

 

 

-오오극장 관객프로그래머 류승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