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놀이와 가늠
만일 우리의 선택이 음으로 표현되는 거라면, 오히려 그것의 합성음은 처음부터 그릇에 포크를 수십 차례 긁는 듯이 튀지도 천상의 가닿기 위한 이정표와 같은 황홀한 조화를 이루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특정 음들만 내게 쥐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선택의 순간에서 완전히 뗄 수도 없다. 나의 음에 부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그 음이 어느 순간 손가락 마디 사이 사이에 끈적한 액체로 묻어있을 수 있으며, 상대의 음과 합성하기 위해 선뜻 내밀기도 한다. 손가락을 천천히 하나씩 떼어내며 음을 찾아가고 점점 벌어지는 손가락이 음의 간격을 가늠하는 것, 이 행위의 반복.
영화 〈레슨〉이 시작되고 공원에서 두리번거리며 서성이는 경민의 주위로 누운 채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이들과 동일한 음을 선택한 경민이 공원에 눕는 순간,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 일어난다. 3년 동안 만남을 가지며 ‘우리’의 사이(결혼)가 고정적으로 정의되기를 원하는 선희와 이를 외면하는 경민, 서로 영어와 피아노 수업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피어난 욕망―그 욕망의 ‘정의’(“우리 무슨 사이예요?)를 원하는 경민과 마찬가지로 이를 외면하는 영원. 〈레슨〉은 인물들이 선택한 음과 그 음이 욕망 속에서 합성되는 과정, 뒤섞임에서 발생하는 사이의 거리를 잔잔한 속도로 가늠한다. 또한, 영화는 세 사람의 정신과 육체로부터 발생하는 요동을 과잉된 정서적 움직임으로 다가가는 일이 마치 허드렛일인 듯 행동한다. 동네 곳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모여 큰 소용돌이가 되고 그 나선이 다시금 풀릴 때 또다시 불었던 혹은 불어오는 바람에 다가선다(‘수업으로 시작된 경민과 선희의 첫 만남’). 상대가 내뱉은 언어의 간격을 가늠하며 키보드에서 손가락을 움직이는 경민과 건반 위에서 손가락의 걸음 속도를 응시하며 상대를 가늠하는 선희, 재밌는 건 두 인물의 수업이 손가락 놀이처럼 느껴졌다는 것이다. 물론 나의 크나큰 상상이겠으나…….
-오오극장 관객프로그래머 이라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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