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열하는, 오래된 가족의 풍경
후덥지근한 여름, 성진은 오랜만에 본가에 방문한다. 분주하게 제사를 준비하는 그 여름날의 시골 풍경으로부터, 우리들은 대가족의 ‘장손’인 성진이 집안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를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다. 뒤이어 영화는 가을과 겨울을 차례로 듬성듬성 경유하며 성진이 가족 안에서 겪어내는, 혹은 목격하는 상실과 충돌을 담아낸다.
<장손>은 가부장의 풍경에 경제적 상황을 개입시키면서 미묘한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영화는 일견 정다운 가족을 묘사하며 소탈한 웃음을 자아내다가도, 그 껍데기 속에 숨어있던 각자의 비밀을 조금씩 누설하며 불편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돈을 매개로 삼아 <장손>은 가족이라는 타인들 사이에 녹아있는 오래된 차별의 논리를, 그리고 그것이 작동하는 동안에 켜켜이 누적된 저마다의 울분을 천천히 드러낸다.
극중에서 성진은 장손이라는 이유만으로 많은 것들을 건네받는다.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는 성진에게 검은 봉지를 슬쩍 내밀며 이렇게 덧붙이신다. 누구 주지 말고 너 혼자 먹어라. 그 말은 짧지만 정말이지 달콤하고도 선득한 문장이어서, 다른 누구를 따돌리고 저 혼자 독차지하는 일의 불순한 즐거움을 직관적으로 떠올리게 한다. 성진은 검은 봉지를 열어 그 안에 든 것을 와작와작 씹어 먹는다. 이러한 순간들을 모아서 <장손>은 가족의 일상 속에 뿌리 깊게 침투한 가부장의 잔재를 은밀히 고발한다. 그리고는 넌지시 이런 질문들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성진은 이제까지 어떤 것들을 받아왔을까, 또 무엇을 받게 될까. 어쩌면 성진이 그것들을 거부할 수도 있을까? 그리고는 성진 가족의 균열을 눈앞에 두고 그 대상을 슬쩍 바꾸어 우리들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오오극장 관객프로그래머 김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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