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스텔지어에 대한 노래, 페이소스에 대한 고백
“사리에 어두워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다.” 광화문 근처 종로 거리를 거니는 두 청춘이 있다. 그들은 오랜만에 만나 근황을 나눈다. 남자는 미술을 시작했고, 여자는 영화 일을 계속하고 있다. 그들은 서로 호감이 있는 걸까, 혹은 그저 지나가는 인연 중 하나인 걸까. 같은 길을 걷던 그들은 어느새 갈림길에 도달했다. 둘은 다른 길을 가고 다른 공간에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난다. 연인과 함께 버스를 타고 광화문 거리를 지나던 남자는 이순신 동상을 보며 낮에 여자와 나눴던 이야기를 떠올린다. ‘정말 광화문 동상은 오른쪽에 칼이 있네?’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다.” <미망>은 다른 시간, 다른 계절에서 만난 같은 공간의 사람들과의 인연을 포착한다. 다시 말해, 때는 다르지만 같은 양상을 가진 세 번의 만남을 그린다. 이러한 영화의 구성은 상당히 시적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같은 공간을 보며 이전의 만남을 생각하는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관객들에게 체험시키기도 한다. 마치 우리의 기억처럼 반복되는 공간의 이미지에는 과거의 잔상이 남고, 아무래도 잊기 어려운 추억의 먼지가 겹겹이 쌓인다.
“멀리 넓게 바라보다.” 영화는 모든 것이 끝난 후 우리를 버스에 태워 집으로 보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창문 밖을 보며 그동안의 추억이 떠오른다. 창문 밖으로 지나가는 길목들이 괜히 낯설어 보이기도 하고 마냥 익숙하지 않은 감각이 온몸을 감싸는듯한 느낌을 받는다. 영화의 바깥에서, 무언가 몽글몽글한 것이 떠오른다. 매일 지나오던 평범한 귀갓길에도 뭔가 이전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는 느낌. 시간을 품은 영화가 가진 기분 좋은 마법과 함께, 장기하의 노래를 마음속에 흥얼거리며, 우리는 다시금 새롭게 이 드넓은 세상과 대면할 수 있는 어떤 멜랑콜리한 힘을 얻게 된다.
“작은 바람” 혹은 작은 희망을 품는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런 바람들, 우리의 마음속에서, 혹은 우리의 삶 속에서 변덕스럽게 움직이는 어떤 바람들을 영화는 품는다. 그 페이소스는 결국 당신 앞에 나타난다. 오히려 그것과의 대면이 우리를 더 살 수 있도록 만든다. <미망>은 결국 공간의 노스텔지어에 대한 노래이고 현재의 페이소스에 대한 고백이다.
-오오극장 관객프로그래머 김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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