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풍경
다 보고 나면 머리가 맑아지는 듯한 영화가 있다. <종착역>을 공동 연출한 서한솔 감독의 신작 <늦더위>가 그렇다. <늦더위>는 32세 남성 동주가 8년간 준비한 공무원 시험에 떨어져 도망치듯 서울을 떠나 다른 지역을 여행하는 로드무비이다. 영화는 시종일관 방황하는 주인공 동주의 모습과 함께 우리나라 곳곳의 아름다운 풍경들을 보여준다.
<늦더위>는 굉장히 보편적이면서도 평범한 남자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운다. 영화의 주인공인 동주는 그다지 특별한 점이 없는 30대 초반 남성이다. 이제는 거의 관습적으로, 혹은 강박적으로 주인공에게 특수성을 부여하려고 하는 한국 독립영화의 요즘 세태에 비추어 본다면 꽤 이례적인 설정이다. 또한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주인공의 불행에 대한 공감을 강요하지 않는다. 소위 “불행 포르노”라고 비판받는 한국 독립영화의 소재적인 특성을 이 영화는 가지고 있지 않다. 이 영화는 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불행을 영화 내내 보여주는 주인공의 여행을 통해 승화시킨다.
이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다름 아닌 기진우 배우가 연기하는 동주의 얼굴이다. 무엇보다도 동주는 21세기 한국 청년들의 어떤 정서를 대표한다. 청춘의 생기와 그들의 현실에서 오는 어떤 불안을 삼키고 있는 어떤 얼굴, 어딘가에 멍하니 앉아있을 때,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 고민과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는 갈등이 공존하는 그런 복잡한 표정을 하고서 동주는 어딘가를 가만히 바라본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동주는 울지 않는다. 그럼에도 어딘가로 움직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늦더위>에 무언가 극적인 사건은 없다. 에릭 로메르의 영화가 그렇듯, 홍상수의 영화가 그렇듯, 이 영화도 인물들의 대화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대화의 내용이 그렇게 중요해 보이진 않는다. 대신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대화하고 있는 장면의 풍경이다. 후반부 학교 동창들과 만나 술자리를 가지는 장면에서, 인물들이 발화하는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의 세부적인 내용은 그닥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이 장면은 카메라를 좌우로 천천히 움직이며 그들이 대화하는 풍경을 중점적으로 찍는다. 그 장면에서 오는 알 수 없는 연대감과 위안, 그 감정이 <늦더위>의 정서를 이루는 핵심이다. 결국 <늦더위>는 영화를 통해 한국 청춘들에게 함께 계속 살아가자고 격려하는 협력의 영화이다.
-오오극장 관객프로그래머 김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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