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원을 채우기
영화의 초반부 그림 학원 강사 지수는 캔버스에 연신 원을 그린다. 그리고 싶은 인간 얼굴이 있는데, 이제 생각이 안 나네. 지수는 이렇게 말한다. 지수의 뒷모습을 비추는 이 장면은 쓸쓸하게 느껴진다. 얼굴을 살짝 돌려 측면이 비치고 그래서 채우지 못하고 오직 원만 덩그러니 있는 캔버스가 함께 화면에 비칠 때, 이 장면은 쓸쓸한 동시에 부담스럽게도 느껴진다. 지수의 뒷모습이 지수의 쓸쓸함만을 전달했다면, 캔버스의 텅 빈 원이 잠깐 우리와 대면하는 순간에는 그 빈 원을 채워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이 슬쩍 밀려온다. 텅 빈 원은 여러 가지로 보인다. 지수의 대사를 바탕에 두자면 그것은 누군가의 얼굴이고, 그저 이미지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어떤 구멍이다. 물론, 생각이 나지 않는 얼굴을 상상하며 그린 텅 빈 원은 얼굴인 동시에 지수 마음의 구멍이다
그 텅 빈 원을 어떻게 채울 것일까? 생각해보면 그 전 장면에는 우주를 떠돌고 있는 우주인의 꿈을 꾸는 남자도 등장한다. 그는 이상할 정도로 우주선 발사 뉴스에 집착한다. 어떤 것에 대한 기이할 정도의 강박은 언제나 그 사람 내부에서 비롯된 계기가 있기 마련이니, 그에게도 어떤 텅 빈 원이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써보자. 그 텅 빈 원을 어떻게 채울 것일까? 이것이 <미지수>의 과제다. <미지수>는 내가 위에 적어둔 내러티브만으로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영화가 아니다. 영화에는 등장인물이 갑작스레 등장해서 우리가 모르는 이야기를 능청스럽게 늘어놓는다. 그리고 그걸 해결하려는 실마리조차 거의 던지지 않는다. 이 혼란은 해결할 게 아니라, 우리가 살아내어야 할 것이다.
기실 모든 종류의 결별은 그러한 방식으로 이뤄진다. 과거로 돌아가서 문제의 원인을 아무리 찾는다고 해도, 결별은 완수되지 않는다. 결별은 그렇게 어지럽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 수수께끼는 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혼란을 위해서 존재한다.
-오오극장 관객프로그래머 금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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