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하는 대로
정순은 작은 공장에서 일을 한다. 그는 평생을 이 소도시에서 살았고, 결혼을 앞둔 딸이 있다. 지극히 평범하던 일상에 이전까지는 한 번도 예상해 본 적 없던 일이 닥친다. 정순이 연인 영수와 찍은 영상이 동네 사람들의 휴대폰에서 휴대폰을 타고 돌아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디지털 성범죄. 영화 <정순>의 주된 사건이 되어주는 소재다. <정순>에서 사건이 본격적으로 윤곽을 드러낸 시점은 영화 중반부를 넘어서면서부터이다. 덕분에 관객은 사건 이전의 ‘정순’이 어떤 하루하루를 살아갔는지 자세히 들여다볼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남들이 퇴근하는 시간에 출근하는 정순. 딸이 운전하는 차를 타는 정순. 동료들과 어울리며 잡담하는 정순. 가끔은 오지랖 넓은 참견을 하기도 하는 정순. 웃음이 많은 정순. 아주아주아주 평범한 얼굴의 정순. 그러다 보니 우리는 정순을 단순히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가 아닌 입체적인 한 사람으로 기억하게 된다. 뉴스를 통해 단편적으로 보았던 수많은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들이 결국 정순과 같은 어떤 평범한 개인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더 이상 <정순>이라는 영화를 디지털 성범죄를 다룬 이야기라고만은 바라볼 수 없게 되었다.
영화는 정순이 겪은 사건 자체보다는 사건 이후의 정순이 다시 일상을 회복하는 과정에 더 집중하는 듯 느껴진다. 정순은 이제 누군가가 운전해주는 차에 타지 않는다. 운전석에 앉는다. 직접 핸들을 쥐고 방향을 선택한다. 페달을 밟아 속도를 낸다. 그렇게 눈을 감고도 다닐 수 있는 익숙한 길을 돌아다닌다. 정순이 되찾은 일상은 어느 정도 이전처럼 평화로운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웃으며 길을 걸어가는 영수와 도윤 패거리를 마주한 뒤에 정순은 요동치는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 홀린 듯이 차에서 내려 영수를 뒤따라간다. 일상을 잘 살아가다가도 느닷없이 마주친 트라우마에 다시금 사건이 일어나던 그날로 되돌아가고 만다. 어디 정순만 그럴까.
영화 <정순>의 결말은 누군가에겐 갑갑할 수도, 또 누군가에겐 속상할 수도, 다른 누군가에겐 막연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영화의 결말이 좋다. 정순의 ‘선택’이라는 점에서 그러했다. 정순이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삶,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삶. 영화 이후의 정순이 여전히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기를 바라게 된다.
-오오극장 관객프로그래머 박정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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