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난 리뷰

<그녀의 취미생활> 프리뷰 - 초록 사이로

초록 사이로

 

정인은 박하 마을에 산다. 온통 초록으로 둘러싸인 이 시골 동네는 정겨우면서도 매섭고, 청량하면서도 음울하다. ‘초록은 정확히 이 상반된 느낌을 동시에 가져다주는 색이다. 여름의 박하 마을은 초록의 숲과 나무로 둘러싸여 있다. 우거진 풀숲 사이론 그 어떤 것도 빠져나가지 못할 것처럼 느껴진다. 박하 마을 사람들은 친근하게 굴면서도 어딘가 불쾌한 기운을 안고 있다. 정인은 그런 박하 마을에서, 박하 마을 사람들 틈에서 매일 가위를 손에 쥔 채 잠에 든다.

 

박하 마을 사람들은 머리를 질끈 묶고 일하기 편한 옷을 입는다. 호박 비닐하우스, 사과 과수원, 깻잎 밭 할 것 없이 돌아가며 일손을 돕는다. 다들 비슷한 모습을 하고 비슷한 일상을 살아가던 이 시골 동네에 혜정이 나타난다. 남들이 농사일하러 가는 시간에 자리를 펴고 명상을 하는, 일복을 입은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어디 휴가라도 온 듯한 차림을 한 혜정. 서로가 서로의 사생활까지 꿰고 있는 이 마을에 나타난, 유일하게 다른 모습을 한 혜정은 정인에게 숨 쉴 구석이 되어준다. 정인은 혜정의 취미생활을 하나씩 함께하며 점차 혜정을 닮아간다.

 

<그녀의 취미생활>은 반복적으로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정인과 마을 사람들 사이의 묘한 거리감, 알 수 없는 혜정의 정체. 그리고 정인의 구석구석에 남아있는 폭력의 흔적까지. 명확하게 설명하기보다는 그저 보여줌으로써 관객이 영화가 가진, 딱 불쾌하지 않은 선의 으슥한 기운을 따라가게끔 만든다. <그녀의 취미생활>은 시골 마을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폐쇄성을 잘 이용한 영화다. 폭력을 묵인하던 박하 마을 안에서 아마 정인의 비명은 우거진 초록에 부딪혀 튕겨 나오기만 했을 것이다. 혜정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정인과 같은 삶을 살고 있을 누군가에게도 혜정이 나타나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 오오극장 관객프로그래머 박정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