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됐든 바다는 멈추지 않는다
바다를 찍는다는 것은 현순직 해녀가 말하듯 바닷물이 내려갔다 올랐다하는 상하운동을 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운동은 해녀들 사이에 전설로 전해지는 용왕이 일으킨다고 여겨질 만큼 그들에게는 성스러운 것이다. 이 ‘성스러움’을 보충해보자면 이 단순하고 반복적인 조류(潮流)의 운동은 멈추지 않는다는 특성이 있다. 그리고 이 중단되지 않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조류는 영원을 담보한다. 끝나지 않는다는 것은 <물꽃의 전설>에서 중요한 명제다. 오랫동안 해산물을 따는 일을 해온 현순직 해녀는 자신의 노쇠함에 따라 물질의 빈도가 줄어들고, 그것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채지애 해녀는 물질을 하면 할수록 자신의 일에 익숙해진다. <물꽃의 전설>은 성스러운 바다라는 공간과 융화되는 해녀들의 이야기인 동시에, 그것을 지속하는 데에 있어서의 고충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 고충은 다름 아닌 바다의 오염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조류는 그 세기가 다를 뿐 항상 멈추지 않고 운동한다. 그래서 바다 표면에서 그 운동성의 흔적들은 포착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바닷속이다. <물꽃의 전설>의 진귀한 인상들 중 하나는 조류의 운동 자체를 호명하여 바닷속의 (표면과는 상대적으로)정적인 환경 속에서도 우리는 조류를 인식하게 된다는 점에 있는데, 바다의 생물들이 즐비할 때는 더더욱 그 운동이 인식하기 쉬워진다. 바닷속의 조류를 포착하긴 힘들어도, 그것에 힘을 받아 바다생물들에 가해지는 영향에 따라 나타나는 (겉의)반응은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다의 오염은 이러한 ‘반응의 종말’로 나타난다. 물리적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여전히 운동성이 쉽게 포착되는 표면과는 달리 속에서는 그것이 어려워진다. 바닷속의 정적. <물꽃의 전설>은 아름다운 물꽃은 비롯한 바다 생태계 대신에 이 정적을 포착하는 것에 그칠 수밖에 없다.
또 하나의 운동성. 해녀들의 물질. 현순직 해녀는 주지했듯이 자신의 노쇠화에 따라 물질을 점점 멈추게 된다. 그와 동시에 바다도 점점 정적으로 변해간다(혹은 보인다.). 눈이 몰아치더라도 바다에 들어가던 해녀들은 오염된 바다 앞에서 자신들의 운동을 멈추게 된다. 전설이 될 현순직 해녀의 물질을 다음 세대(채지애)는 이어갈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바다의 성스러운 조류를 그저 밖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을 것인가.
- 오오극장 관객프로그래머 류승원
'지난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잔고: 분노의 적자> 프리뷰 - 영화 만들기의 기쁨과 슬픔 (0) | 2023.09.11 |
---|---|
<듣보인간의 생존신고> 프리뷰 - 세 사람만 있으면 없는 뮤직비디오도 만든다 (0) | 2023.09.05 |
<피아노 프리즘> 프리뷰 - 더 많은 감상 (0) | 2023.08.30 |
<그녀의 취미생활> 프리뷰 - 초록 사이로 (0) | 2023.08.28 |
관객프로그래머 초이스! <가단빌라> 추천사 - 확장, 반복, 나아감 (0) | 2023.08.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