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법을 배우기
저는 장윤미 감독을 「어머니가방에들어가신다」(2014)로 처음 접했습니다. 어머니가 카메라를 드는 그 기쁨으로 가득한 장면을 되뇌며, 장윤미라는 이름을 기억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돌아보면 의뭉스러운 생각도 했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가방에들어가신다」가 시작의 복됨과 기쁨 덕분에 좋았다면, 그의 다음 영화는 별 볼일 없는 게 아닐까? 생각했던 것입니다.
물론 틀린 생각이었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장윤미의 영화를—수년간의 요청 끝에!—추천하고 있듯, 장윤미의 영화들은 항상 탁월했습니다. 그런데 ‘장윤미의 영화들’이라 제가 이 영화들을 모을 수 있을까요? 주지하듯 ‘어느 작가의 영화’라고 부른다는 것은, 개별 영화들을 그 작가의 세계 안에서 배치할 수 있다는 것을 함의합니다. 낡은 비유지만 ‘오즈의 영화’라고 할 때 우리가 몇 가지 속성을 곧잘 떠올려버리는 것처럼 말예요. 장윤미의 영화들에서 ‘장윤미의 영화들’로 묶이는 속성을 찾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어머니가방에들어가신다」와 「콘크리트의 불안」(2017)은 얼마나 다른지요. 또 「콘크리트의 불안」과 「깃발, 창공, 파티」(2019)는 얼마나 다른가요.
그러나 조금의 곡예를 거친다면, 장윤미의 영화들을 ‘장윤미의 영화들’로 묶을 수 있는 속성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장윤미가 대상처럼 보는 법을 계속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대상의 자리에 들어간 것이 어머니, 할머니, 아버지, 아파트, 노동조합, 고양이, 시간 같은 게 아닐까요? 저는 장윤미가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라고 썼습니다. ‘-고자 하는’으로 간격을 띄운 이유는, 장윤미가 대상의 자리에서 보고 있다는 확신을 언제나 차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상처럼 보고자 하는 의지와 대상처럼 볼 수 없다는 윤리 사이에서, 우리는 장윤미의 영화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장윤미의 목적은 한 편의 영화를 잘 만드는 게 아닙니다. 장윤미의 목적은 이렇게 볼 수 있을까? 그리고 이렇게 해도 영화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가깝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참 드문, 교육 영화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매끈한 형상의 영화를 만드는 건 참 쉽습니다. 제도의 형성물인 그것이 이미 탄탄하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교육 영화를 만드는 건 참 어렵습니다. 관습에 매몰되지 않고 언제나 새로이 보고자 해야 하기 때문이죠. 중요하고 좋은 것은 당연히 장윤미 쪽입니다. 영화를 새롭게 보면서 만나게 되는 형식적 자원들: 미래에서 볼수록 장윤미의 영화는 탁월해집니다.
- 오오극장 관객프로그래머 금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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