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의 이름
서로 반대 방향으로 누워 자는 자매, 발로 치는 장난, 도어락 버튼이 마구 눌리며 평안함이 깨지던 순간.
짧은 오프닝 장면을 시작으로 <오 즐거운 나의 집>(2022)은 제가 가장 사랑하는 영화가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영화의 아주 사소한 부분에까지 숨어있는 디테일을 찾아내는 재미도, 낮은 채도에서 오는 미묘한 분위기도 모두 제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가 되어주었지만. 가장 큰 이유를 들자면 저 장면을 제게 와닿게 만들어 준 어떤 배우의 표정과, 시선과, 목소리와, 매력적인 마스크 때문이겠지요. 그러니 결국 이 추천사는 그 배우를 향한 사랑 고백처럼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
소년심판 백성우. 아마 가장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그의 이름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백성우이기 이전에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표정의 연주(음파, 2017)이기도. 투덜대면서도 내내 아빠의 긴 일정을 함께 해주는 혜수(코스모스, 2020)이기도. 그 어디에도 편히 누울 곳 하나 없던 지연(오 즐거운 나의 집, 2022)이기도 했습니다. 비슷한 점이라고는 없는 캐릭터들을 그는 참 자연스럽게 표현해냅니다. 연주를, 혜수를, 지연이를 모두 한 사람이 연기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될 정도로 그는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느 방향에서 보느냐에 따라 신경질적이기도, 개구져 보이기도, 한없이 순수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얼굴에서 나오는 힘이 아닐까요. 배우로서 지독하게 매력적인 지점입니다. 이 때문에 그는 어느 이야기 속에 던져지더라도 캐릭터를 숨 쉬게 만들어주겠구나 하는 믿음이 생겨버리고 맙니다.
배우의 길을 걷게 된 이후에 머리카락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사람. 이 한 마디만으로 그가 연기에 얼마만큼의 진심을 쏟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자부심을, 거기에서 나오는 사랑을, 그로부터 비롯된 두터운 고민을 온통 끌어안은 채 나아가는 사람의 행보에 실망하기란 어려운 법이지요. 그러니 이연이라는 배우는 또 수없이 많은 이름을 갖게 될 겁니다. 우리는 점차 더 많은 이름으로 그를 기억하게 될 것이고요. 또 어쩌면 이연이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모든 부가적인 설명이 필요 없어지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고, 그런 날에 앞서 미리 짐작해 봅니다.
- 오오극장 관객프로그래머 박정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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