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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to Make an Independent Film: Step-by-Step 01] 노력형 영화 만들기 / 김현정 감독

‘창작하기’, ‘영화 연출하기’에 ‘노력’이라는 단어를 붙이면 조금은 촌스럽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렇다. 나는 고지식하고 촌스러운 방식으로 영화를 만든다. 평소 겁이 많아 돌다리를 두드리고 또 두드리는 연출자이다. 그런 방식이 나에게 잘 맞고 즐거운 지 묻는다면 또 그렇지는 않다. 끝이 없는 고민에 스스로 채찍질을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아프고 괴로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년 차 연출자로 네 편의 단편과 첫 장편을 만들며, ‘노력형’ 연출 방식에 대해 고민하고 자문하면서 나름 확신이 드는 지점도 생겼다. 사실 무엇이 좋은 연출인지 영화를 만들면 만들수록 점점 더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앞으로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분들이 조금이나마 덜 헤매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동안의 연출 경험에서 특히 고민 깊었던 점들에 대해 전해보려 한다.

 

<흐르다> 김현정 감독

 

시나리오, 끝까지 고민하기

어디선가 감독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는 글을 보았다. 자신의 이야기를 써서 연출하는 감독과 타인이 쓴 이야기를 연출하는 감독. 하지만 자신의 이야기이든 타인의 이야기든 연출자는 자신이 연출할 이야기에 온갖 정성을 쏟아야하는 것은 같다. 달리 말하면, 어떤 이야기이든 연출자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다시 의심하고 곱씹으면서 사력을 다해 소화시켜야 한다.
물론 영화에서 시나리오가 중요하다는 점을 감독들이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영화 작업은 해야 할 업무가 워낙 산더미라 자칫 시나리오 작업이 뒤로 미뤄지는 경우가 빈번하다. 하지만 영화 작업 중 가장 우선순위는 결국 시나리오와 이야기에 두어야 한다는 것에는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자신이 연출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장악하지 못한다면 지난한 영화의 과정들을 어떤 힘으로 견딜 수 있을까? 힘들게 완성한 영화가 연출자마저 설득하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준비 과정에서 불안한 마음이 크겠지만 무엇보다도 이야기와 시나리오를 끝까지 물고 늘어지길 바란다.

그렇다면 시나리오를 끝까지 고민한다는 것의 기준은 무엇일까? 영화를 완벽히 준비해서 찍겠다고 가정한다면 평생 시나리오를 고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시나리오는 연출자가 연출을 하는 그 시기의 불완전함이 필요할 때가 있다. 시나리오에서 채워지지 않은 미완의 무언가를, 연출을 하는 과정에서 찾아보고자 계속 질문하는 과정은 연출자를 긴장하게 하고 영화를 죽지 않게 만드는 힘을 준다고 믿는다. 그와는 별개로 이제 시나리오로 연출을 해도 되겠다고 판단되는 기준점은 따로 있다. 바로 시나리오 속 인물의 감정라인이 연출자에게 납득이 되었을 때이다.

인물의 감정라인은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 해석한다. 나는 시나리오를 쓸 때, 쓰려고 하는 하나의 소재가 좁혀진 이후 반드시 ‘3막 구조로 이야기를 전개해본다. 이야기에서 통용되는 3막 구조를 통해 이야기를 써보라 하면 별 것 아닌 방식이라 치부하거나 창작자의 직관력을 방해할까봐 거부하는 경우들이 있다. 하지만 내 경험상 3막 구조라는 제약사항은 오히려 창작력을 극대화시키곤 했다. 3막 구조와 그 안에서의 플롯점은 이야기 쓰기가 너무 막연해 엄두가 안 나던 시절의 나에게 이야기 전개의 힌트를 주었고, 각 플롯점의 역할 안에서 발생될 수 있는 상황들을 자유롭게 상상하게 했다. 그리고 이때 중요한 점은 앞선 플롯점과 다음 플롯점 사이에 인과관계를 형성할 때, 그 원인을 반드시 인물의 감정에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감정의 인과관계가 제대로 구축되지 않으면 이야기는 힘을 잃는다.
이야기의 소재를 찾을 때 작가의 경험이 좋은 답이 되는 이유는, 경험에서 비롯된 감정을 당사자인 작가 본인이 충분히 이해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야기의 완성도는 일련의 사건 안에서 인물의 감정라인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지의 여부로 기준 삼는다. 하지만 이야기 전체를 경험 사실로만 채울 수 없을뿐더러, 특정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서라도 결국 작가가 겪지 않은 사건과 상황을 이야기로 구성해야 한다. 이때 작가는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상황일지라도, 인물에 작가 자신을 투영해 최대한 몰입하고 감정을 상상한다.

하지만 아무리 신중히 고민해서 구축한 감정라인이라 할지라도 관객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는 점 또한 반드시 새겨야 한다. 그러한 점을 전제로 시나리오의 완성 기준을 감독 자신이 영화의 감정 전개에 충분히 납득 되는가로 삼는다면 비로소 시나리오를 매듭지을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연기보다 좋아하는 연기

좋은 연기는 너무 상대적이라, ‘좋아하는 연기를 고민하는 쪽이, 확신이 부족한 연출자가 작품에 가장 적합한 연기를 찾는데 훨씬 더 수월하다. 사실 연출자가 본인이 좋아하는 연기를 고민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작품 속 인물은 곧 연출자의 인간상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창동 감독님과 박찬욱 감독님, 각자의 작품에서 다뤄지는 인물 군상은 매우 다를뿐더러 거기에 따라 연기도 다르게 표현된다.

최근 독립영화 진형에선 마치 연기를 하지 않은 듯한, 실생활에 가까운 연기방식을 추구하고 있다. 나또한 그러한 점을 지향해왔고 무언가 만들어진 듯한 연기하는 연기를 최대한 배제하려 애썼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좀 바뀌었다. 내가 추구하는 방식이 정말 내 세계관을 반영하는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맹목적으로 실생활에 가까운 연기가 진짜라고 믿었는데 정말 그러한가.

이야기와 영화의 취향을 찾아가듯, 앞으로 연출자로서 추구하는 인물상과 거기에 적합한 연기를 찾아가려 한다. 내 영화는 실제 삶과 유사한 점이 많지만 분명 만들어진 세계이다. 앞으로는 단순히 연기 스타일이 아닌, 내가 흥미를 느끼는 인물상에 대한 고민이 커질 것 같다.

<나만 없는 집> 김현정 감독

 

영화 장면은 결국 이야기

시나리오만큼이나 영화의 장면 구성을 하는 것은 참 곤혹이다. 더욱이 독립영화는 연출자가 제작 과정을 병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섭외 등의 지난함에 지친 감독들이 열심히 고민한 이야기를 콘티 과정에 잘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가 쉬이 일어난다. 나또한 이런 실수를 번번이 겪고 있기에, 장면 구성을 할 때 최소한의 규칙에 최대한 집중하려고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현실적인 측면, 연출 방향의 측면을 고려해 샷의 수를 되도록 적게 구성하는 편이다. 샷의 수가 늘어나면 제한된 시간 안에 긴 호흡으로 연기해보는 기회가 줄어든다. 아무래도 배우가 연기를 할 때 감정의 흐름을 쭉 이어나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가장 긴 호흡의 마스터샷을 무엇으로 할지 먼저 정하고 이후 최소한의 커버리지를 생각한다. 다소 적은 수의 샷으로 구성하기 때문에 연출의 의도를 효과적으로 담고자 이유 없는 샷은 되도록 배제하고 샷의 결정은 이야기와 감정에서 근거를 찾으려 한다.

 

후반은 지독한 외로움과 싸우는 작업

영화 준비의 대부분은 촬영 기간인 프로덕션에 집중되어 있다. 연출 경험이 적은 감독들은 앞으로 다가올 재난을 알지 못한다. 사실 연출자의 진짜 싸움은 후반 작업에 있다는 것을. 소재를 싹틔우고, 이야기와 감정을 토론하고, 연기와 장면을 고민하고, 섭외 등의 과정을 겪는 것은 그래도 함께 해주는 이들이 있어 견딜만하다. 하지만 후반 작업은 그렇지 않다. 작품에 모든 마음을 실어준 스태프, 배우와 잠시 작별을 한 뒤, 혼자만의 성에 갇혀 지독히 자책해야 하는 시간이 바로 포스트 프로덕션기간이다.

연출자는 영화 전체 과정에서 에너지를 잘 분산할 필요가 있다. 어느 한쪽에 너무 힘을 실어버리면 끝까지 완수할 힘을 잃게 된다. 영화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 작품을 완성해낸다는 경험은 연출자에게 굉장히 중요하다. 작품을 완성해내지 못한 타격은 생각보다 크다. 나또한 습작 삼아 가볍게 시작한 작품이 여러 사정으로 완성하지 못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자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어찌됐든 작품을 완성한 경험은 다음 작품의 결정적인 자양분이 되기 때문에, 영화의 완성 여부는 아무리 그 중요성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럼에도 연출자가 작업을 포기하게 되는 지점은, 많은 경우 후반 작업을 할 때이다. 촬영 원본을 열어보기가 두려워 몇 달간 미뤘다는 이야기는 남일 같지가 않다. 그렇기에 후반 작업을 할 때는 그 어느 때보다 연출자의 마인드 컨트롤이 중요하다. 내가 이 시기에 주로 곱씹는 생각은 이것이다. ‘내가 실제로 만든 작품은, 내 상상 속 완벽한 작품에 절대 미치지 못한다.’ ‘일단 문지방만 넘어보자.’ 두 가지 생각을 관통하는 공통점은 작품에 대한 기대감을 내려놔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되도록 자책하지 말자. 후반 작업 과정은 작품을 새로이 쓸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촬영할 때는 결코 알아채지 못했던 새로운 가능성을, 외로운 후반의 시간을 견딘 사람만이 발견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사실 내 노력의 반 이상은 기존의 적어둔 답을 의심하는 데 있었다. 왜 이야기를 쓰려고 하는가. 이 감정이 맞는가. 이 샷의 근거는 무엇인가 등등. 질문을 강박적으로 던져야 겨우 작품에 가닿는 느낌이 들었다. ‘상상 속 완벽한 작품에는 결코 미치지 못하더라도, 답을 찾아 헤매는 무수한 질문들은 연출자의 두려움을 넘어서 작업 그 자체를 사랑하게 했다. 적당히 하기보다 온전히 쏟고 노력하는 편이 훨씬 더 쉽다는 것. 온전히 노력했을 때 빠져드는 몰입감은 더없이 값지다는 것. 지금까지 연출자로서 내가 확신하고 있는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