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정 감독의 영화에서 어떤 팽팽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아마 자신의 인물 (또는 공간) 을 대하는 감독 특유의 집중력에 우리가 자연스레 동화되기 때문일 것이다. 항상 한 사람의 여성 단독자를 주인공으로 설정해 온 그녀의 영화들은, 하나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서술 매체로써의 영화이기에 앞서 언제나 한 명의 ‘사람’을 보여준다는 것에 그 의의가 있다. 그녀의 영화에서 인물은 이야기에 우선한다. 최소한 나는 그렇게 느꼈다. 하여 각각의 등장인물들에 대해 깊이 생각, 고민해 볼 필요성을 느꼈고, 그 과정에서 인물과 그 사이의 ‘공간’ 그리고 ‘관계’라는 두 개의 키워드를 떠올릴 수 있었다. 이건 내가 느낀 김현정 감독 영화 속의 몇몇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다.
은하와 세영 – 공간 속의 두 사람
폐업을 앞둔 비디오 가게를 홀로 지키는 주인. <은하비디오>의 은하(김예은)는 제목 그대로 이야기 속의 인물과 공간이 일체화된 경우 (은하-비디오)에 해당한다. 은하에겐 내 몸과도 같은 비디오, 이젠 사양 산업이 되어버린 그 비디오는 이제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고, 그건 오직 은하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이름과 모습이 등장하지 않는) 그녀의 전 남자친구 - 크레딧에도 나오지 않는다 - 또한 마찬가지다. 추억이 담겨 있는 낡은 비디오테잎처럼, 누군가에 대한 기억도 점점 사라져 간다. 철거된 가게를 뒤로 한 채, 트럭을 타고 떠나는 은하의 모습 뒤로 텅 빈 비디오가게 (였던 곳) 의 모습을 담는 풀 숏이 따라붙는 것 그리고 그것이 영화의 마지막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지극히 논리적인 선택이다. 공간의 끝은 곧 인물의 끝과 같고, 비디오 즉 영화의 끝은 자연스럽게 이야기의 끝이 된다.
<나만 없는 집>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감독의 자전적인 요소가 녹아든 영화로 알려진 이 작품에서, 주인공인 초등학생 세영(김민서)은 가족 구성원의 부재 속에 발생하는 외로움, 또는 구성원의 존재 앞에 오히려 더욱 큰 상실과 소외를 겪는 모든 단독자들을 대표하는 존재다. <은하비디오>의 은하가 비디오와 동등한 위치에서 함께 소멸을 겪는 길을 선택한다면, <나만 없는 집>의 세영은 ‘나’만 없는 상황, 즉 부재하는 상황을 통해역으로 자신의 존재를 영화 속에서 드러낸다. 즉, 부재는 존재를 증명한다 (『생각이 나서』, 황경신). 그리고 앞선 단락에서 언급한 <은하비디오>의 결말처럼, <나만 없는 집>의 결말 또한 자신의 집 거실에 홀로 앉아 있는 세영의 모습으로 끝나는데, 이는 곧 영화의 시작과도 정확히 유사하며 이때 세영은 항상 식탁에 앉아 열심히 무언가를 먹고 있다. 처음과 끝이 맞닿아 있는 이 형상은, 무언가를 먹는 행위 즉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행위와 매번 함께한다. 무언가를 씹어 삼키고, 소화를 시키는 것. 즉 스스로 양분을 만듦으로써 앞으로 이어질 삶의 시간을 미리 담보해내는 것. 영화 내내 부재했던 그 소녀는, 그렇게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엄연히 존재하는 길을 선택한다. 그리고 여기서 집이라는 공간은, 소녀에겐 어쩔 수 없는 외로움의 배경이지만 한편으론 그녀의 새로운 탄생을 지켜보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은하비디오>와 <나만 없는 집>에서, 영화의 시간은 주어진 공간 속을 유유히 흐르며 마지막까지 두 사람과 조용히 함께한다.
가영과 민경 – 관계 속의 두 사람
감독의 시선 (또는 자세)에서 약간의 변화를 느낀 건 <입문반>을 처음 본 후였다. 한 사람의 여성 단독자가 등장한다는 점에서는 변함없지만, 이 영화에는 공간의 색깔이 탈색되어 있다. 가영(한혜지)은 시나리오 수업을 듣기 위해 서울과 지방을 오가지만, 가영 자신의 공간인 의성은 영화에서 제대로 묘사되지 않고 대신 인물과 인물 사이의 치열한 관계와 대사들이 그 자리를 채운다. <이방인>이라는 원제를 가졌던 이 영화에서, 가영은 같이 수업을 듣는 동료 무리에 섞이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고 관계의 연착륙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여러 사건들과 부딪힌다. 이는 곧 그녀의 일상에 균열을 일으키고, 영화는 관객을 지금까지 전혀 본 적 없는 낯선 곳으로 데려간다. 우리는 영화 속 가영의 모든 선택과 행동들을 지켜보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녀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입문반>은 관계의 묘한 비틀림,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과 충돌들을 담으며, 우리가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복잡한 일인지를 이야기한다.
집 안에서 대다수의 사건이 발생하고 마무리되는 <외숙모>는, 어쩌면 공간이 주를 이루는 영화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여기서 집 거실이라는 공간은 등장인물들을 한데 모으는 집결지로써의 기능만 수행할 뿐, 거기에 별도의 주문이 깃들어 있지는 않다. 다시 가족의 이야기로 회귀한 이 영화에서 감독은 <입문반> 때와 마찬가지로, 제목을 통해 누군가와 누군가의 관계 그리고 그 관계 속의 한 대상을 정확히 호명한다. 주인공이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끌어갔던 <입문반>에 비해, <외숙모>의 특이점은 이야기상의 주체가 ‘외숙모’가 아닌 임산부이자 집안의 막내딸인 민경(조민경)이라는 점이다. 임신 중이라는 이유로 제사 자리에서 노동의 의무를 면제받고, 친척들이 맨바닥에 앉아 말싸움을 하는 동안에도 홀로 벽 아래 소파에 앉아 있는 (또는 놓여 있는) 그녀에겐 자연스레 관찰자의 역할이 부여되지만, 그 시선을 포착하는 카메라에 담기는 건 세계의 파열음을 감지하는 예민함이다. 관계 안에 위치하길 원하지만 현실은 그 바깥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존재, 그리고 반대로 관계 바깥에 머무는 듯 보이지만 실은 그 관계 안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이 <입문반>과 <외숙모>에는 각각 존재한다. 공간에 새겨진 기억의 흔적을 더듬던 김현정 감독의 영화들은, 이제 관계의 균열과 소음을 탐지하는 데 그 힘을 기울인다. 그리고 그 섬세함은 아마도, 감독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의 모습이 아닌 영화 속 한 사람의 눈에 비친 세계의 모습을 담아내고자 했던 결과일 것이다.
누군가의 영화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꺼내어 이야기할지는 어디까지나 관객 각자의 몫이다. 어떤 누군가는 위의 네 영화를 전혀 다른 식으로 바라보고, 완전히 다른 식의 결과물을 내놓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문장이 있다면, 어찌 됐던 김현정 감독은 자신이 만든 인물의 곁을 절대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귀를 기울이고, 주변을 서성거리다, 때론 용기 있는 두 손을 내밀기도 할 것이다. 한 사람을 향한 집중력으로, 이 세계는 유지된다.
지금까지 총 네 편의 단편을 찍은 김현정 감독은 이제 그녀의 첫 장편 <흐르다>의 제작 완료를 앞두고 있다. 여전히 누군가는 영화를 찍고, 누군가는 그 사람의 영화를 볼 것이다. 한 사람을 바라보는 꾸준한 시선은, 영화 바깥을 타고 넘어오는 다른 누군가의 시선으로 인해 그 빛을 잃지 않고 나름의 힘으로 지속된다. 그거면 된 것 아닐까, 오늘은 감히 그렇게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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