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모르는 게 문제죠.”
영화를 두 번째로 마주한 날, 들키고 말았다. ‘장국영’은 왜 스크린 밖의 나에게 말을 거는 걸까. 다른 건 몰라도 내 마음에 대한 확신은 가득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학창 시절, 매년 학기 초가 되면 정해진 틀에 맞춰 자기소개서를 내곤 했다. 그것이 정말 나를 소개할 수 있는 건지 아직 의문이지만, 그 덕분에 스스로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으니 나쁜 마음은 없다. 그렇게 취미와 특기 모두를 서슴없이 쓰던 꼬마는 조금 더 자라서 특기란을 비우는 청소년이 되었다. 주제를 알게 된 거라 생각했지만, 아니- 남을 보기 시작한 거다. 그러다, 너는 이제 어른이다, 사회가 그리 말해주는 나이가 되었을 때는 특기를 먼저 채우고 취미 앞에서 망설였다. 조금 더 넓은 세상에서 더 많은 타인을 보았고, 더는 나를 들여다보지 않게 된 것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는데, 나를 관철하려고 애쓰는 사람이라 여겼는데, 말이 돼? ‘장국영’을 만나기 전까지 미처 깨닫지 못했다. 나를 보는 법을 잊어버린 나를.
주인공 ‘찬실이’도 그랬을 거다. 영화가 아닌 삶을 깊이 생각한 적이 없을 테고, 생각하지 않아도 될 만큼 영화에 열정이 가득했으며, 오랜 시간을 나눈 감독과 평생 PD 일을 할 거라고 자신하며 살았을 것이다. 자전적인 이야기가 모티프가 된 영화이니, 김초희 감독도 어쩌면 그랬을 거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긴 세월 함께한 영화감독의 돌연사로 어처구니없게 일자리를 잃은 영화 프로듀서 ‘이찬실’의 마음 찾기 여정이다. 집세 절감을 위해 산동네로 거처를 옮긴 ‘찬실’. 반지하도 사각형도 아닌 요상한 방에서의 새 삶이 시작된다. 꽃이 꺾인 듯 보이지만 싹이 난 것이다. 앞길이 막막해도 당장 먹고는 살아야 하지 않나, 터전을 옮긴 그는 친한 배우 ‘소피’네 가사도우미가 되기로 결심한다. 앞치마를 두르고 바닥을 닦는 ‘찬실’은 꽤 건강한 사람으로 보인다. 단단하고 꿋꿋하게 살아온 인물. 그런 그가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의 상심을 감히 헤아리기가 어렵다. 나는 지금까지 열심히 잘 살아왔는데, 알아주길 바란 건 아니지만 몰라주길 바라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찬실’을 한국 영화의 보배로 칭했던 ‘박대표’는 ‘지감독’ 없는 ‘찬실’을 매섭게 떨쳐낸다. 장을 보고 집으로 가는 길, 전화 한 통에 달려간 카페에는 졸고 있는 ‘박대표’가 있다. 깨어난 그는 ‘찬실’이 사 온 대파를 보며 “크다-” 말한다. 다른 어떤 대사보다도 그게 참 걸렸다. 커다란 대파를 보고 크다고 말했을 뿐인데 뭐가 이렇게 아픈 건지, 대부분의 상처는 그렇게 시작된다. 비수를 꽂는 ‘박대표’의 언행은 내 마음까지 후벼 팠다.
누구보다 씩씩하게 길을 걸어온 ‘찬실’이 자신이 무얼 한 사람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툭 뱉는다는 건 감싸 안아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고맙게도 ‘찬실이’ 주변엔 그런 사람이 많다. 사람에게 상처를 받고 사람에게 기댈 수 있는 건 참 아이러니한 풍경이지만, 잔인하고 감사하게도 이 세상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
‘소피’는 무엇이든 잘 잊어버리지만 ‘찬실’만은 잊지 않고 살뜰히 챙긴다. 근심 소에 피할 피, 근심마저 지워버리는 그는 ‘찬실’에게 알게 모르게 긍정의 영향을 준다. ‘소피’의 불어 과외 선생님이자 영화감독 ‘김영’은 ‘찬실’이 잊고 살던 감정을 느끼게 해준다. 비록 사심을 받아줄 순 없을지라도, 또 비록 영화 취향은 다를지라도 생각을 나눌 수 있는 따듯한 동생이다. 산동네에도 뜻밖의 복이 있다. 영화를 좋아했던 딸을 앞세워 보낸 ‘복실 할머니’는 ‘찬실’에게 딸의 방을 내어주고 그를 친딸처럼 살핀다. 당신이 살아온 삶이 깊은 위로가 된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툭툭 내뱉는 말이 큰 울림을 준다. 그 집에서 만난 유별난 인물 ‘장국영’. 귀신인지 외계인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는 ‘찬실’의 눈에만 보이는 특별한 존재다. 불쑥불쑥 나타나 ‘찬실’이 스스로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당신 멋있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조금만 더 힘을 내봐요.”, “제가 멀리 우주에서도 응원할게요.” 마침 ‘찬실’은 홍콩 배우 장국영을 좋아하는데, (닮진 않았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나를 응원해준다는 건 얼마나 큰 힘인가. 거기다 달빛을 따라 함께 전구를 사러 가는 후배들까지… 소모적인 캐릭터 하나 없이 모두 사랑스럽게 빛난다.
결국 모든 건 마음에서 비롯된다. 어떻게 바라봐주느냐에 따라 그 존재는 무한히 달라질 수 있다. 물론 스스로의 눈길이 가장 중요하다. 그 눈길을 잃지 않도록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있기에 ‘찬실’은 길을 잃지 않고 빛을 낸다. 어두운 산속, 후배들 뒤에서 묵묵히 빛을 비추는 빛나는 열매 ‘찬실’. “우리가 믿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보고 싶은 거.” 조용히 읊조린 소원이 달에게 닿을 수 있을까. ‘찬실’은 그렇게 한 발짝 한 발짝- 자신을 알아가고 찾아간다. 그 여정의 끝은 어디일까?
영화가 끝나면 영화 속 인물은 어떻게 살아갈까, 매번 궁금하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 찬실이는 복도 많아♪ 경쾌한 엔딩송과 함께 올라가는 엔딩크레딧에 나는 그를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나 자신을 걱정하지도 않을 거다. 나는 아직 러닝타임 70분 즈음의 ‘찬실이’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이며, 그걸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완벽한 해답을 얻지 못했다. 영화의 끝인 96분까지 간다고 해도, 그것이 완벽하다 말할 순 없겠다. “맹세는 하지 마라, 달도 변하는데 뭔들 안 변한다고.” 대신 ‘좋아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기로 했다. 익숙함에 매몰되어 잊고 산 마음이 피어날지도 모르겠다. “아무거나 써도 된다 그랬지, 아무렇게나 쓰라고는 안 그랬는데.” 그러지 않기 위해 애쓰며 살아야지.
좋아하는 걸 잘 표현하는 사람이 부럽다. 그건 대단히 용기 있고 멋진 일이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들려줄 수 있다는 것. 이 또한 엄청난 복이 아닌가. 영화 안팎으로 복 많은 ‘찬실이’. GV에서 감독을 만난 후, ‘찬실이’를 보면 그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가장 큰 이유는 빼다박은 말투. “왜 첫 영화에 코로나가 옵니까.” 모두가 호탕하게 웃었지만, 사실 참 속상한 일이다. 하지만 그 힘든 상황 속에도 ‘찬실이’는 묵묵히 제 길을 찾아가고 있다. 선전한 관객 수에, 차곡차곡 쌓이는 수상 이력에, 반가운 재개봉까지. 물론 수치가 전부는 아니지만 기분 좋은 소식임은 분명하다.
코로나19를 마주한 ‘찬실이’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 영화를 올해 만나게 되어 너무 고맙다. 나의 2020년을 한 편의 영화로 정의해야 한다면,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찬실이는 복도 많지>. 올해가 가기 전에 미루고 미룬 마음을 풀어본다. 너무 하고 싶은 말이 많을 때는 정작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이 영화가 내게 그렇다. 김초희 감독의 팔에는 ‘해석에 반대한다’는 수전 손택의 저서명이 타투로 새겨져 있다. 내게 위안처럼 다가온다. 나는 다만 이 영화가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출발이 되었으면 좋겠다. 누가 봐도 좋을 작품이지만, 산 중턱에서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못하고 있는 당신에게 영화를 선물하고 싶다. 그리고 나와 이 영화를 오래오래 나눌 이가 있다면 더없이 행복하겠다. 해마다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나게 된 나는 아주 복이 많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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