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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작 프리뷰

<어른 김장하> 프리뷰 - TV 다큐멘터리를 극장에서 본다는 것

 

TV 다큐멘터리를 극장에서 본다는 것

 

<어른 김장하>가 김장하가 아닌 그를 취재하는 김주완 기자로 시작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어른 김장하>가 기존의 TV 다큐멘터리를 다시 극장이라는 플랫폼으로 내놓은 결과물임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러한데, 단순히 TV 다큐멘터리의 축소판이 아닐까 우려되는 것이다-극의 방향성 자체도 김주완 기자가 김장하를 어떻게 취재할 지가 중심이 되는 르포의 형식을 취한다. 이제껏 많은 TV 다큐멘터리들이 영화로서의 가치에 실패했다고 여겨졌던 근원적인 지점이 여기에 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TV 다큐멘터리가 지닌 목적의 가장 우선순위가 어떤 영화적인 감흥이 아닌, 사실에 관한 보고에 있다는 것. 그런데 이것이 TV의 형태로 먼저 방영이 되지 않고, 극장의 형태로 먼저 나왔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어른 김장하>의 개개의 쇼트와, 그것들의 합일이 조금 더 시네마틱하게 보였을까.

<어른 김장하>는 살아오며 여러 방면에서 선행을 베푼 김장하라는 사람에 조금 더 심층적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지난한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김장하는 이제껏 인터뷰에 잘 응하지 않았으며, 선행에 관한 질문을 받을 때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묵묵부답의 취재 대상에 결국 김주완 기자는 김장하라는 인물에 대해 다가가는 방식을 바꾼다. 김장하라는 사람에게 도움을 받았던, 혹은 그와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에게 그가 여태껏 행한 선행의 흔적들에 대해 묻는다. 김장하의 많은 선행들이, 다양한 분야들에서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발견되는데 김장하가 본격적으로 인터뷰에 응하게 되는 지점은 그 선행들의 결과물이 완전히 완성되지 않았을 때이다. 이미 행한 것들이 아닌, 조금 더 행해져야 할 것들에 관해 질문을 던질 때 김장하는 비로소 대답을 하는 것이다-그것은 더 이상 물리적으로 선행을 베풀기 힘들어진 자신의 상태를 대신하여 행하는 호소라는 선행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어른 김장하>가 사려 깊다고 느끼는 방식은 김장하가 말을 시작할 때, 동시에 김주완 기자의 역할은 축소가 되는 것이다. 가령 김장하가 야구를 좋아한다는 말을 하는 등의 그의 개인적인 취향을 물어볼 때, 거기에 김주완 기자는 부재해있다. 그렇게 르포는 잠시 멈추고, 김장하라는 인간에 관한 이야기가 잠시 오가는 것이다.

김장하를 시작부터 영화의 형태로 담았다면 어땠을까. 과연 TV보다 영화라는 매체가 김장하라는 인물을 담기에 적절한 형태였을까. 그 질문은 이것이 영화의 형태로 만들어지지 않았기에 답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가끔 TV 다큐멘터리의 르포가 담기에 더 어울릴만한 인물들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김장하처럼 베푼 선행들이 너무 많아 영화의 형태로서는 일일이 보고하기 어려운 경우들처럼. 이러한 TV식 르포가 그를 담는데 적절한 형태였다면, 그것을 다시 영화로 보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오오극장 관객프로그래머 류승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