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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리뷰

<쓰리: 아직 끝나지 않았다>

초점 부재

 

영화 말미 주인공 셰르는 이리저리 부딪치다가 방문 앞에 서 이렇게 말한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도저히 모르겠어요. 나도 같은 생각을 했다. 영화가 뿌리는 기호나 서사의 층위가 다양해서 그런지, 하나의 일관된 논리를 찾을 수 없었다. 이것과 저것이 붙지 않으니, 어찌저찌 조합해도 암흑은 뚜렷이 남아있었다. 이는 물론 결함이 아니고, 미덕이다. 왜냐하면 <쓰리: 아직은 끝나지 않았다>가 연쇄 살인마에 대한 범죄영화이기 때문이다. 연쇄 살인마는 사회도 자연도 온전히 설명하지 못하는 지점에 존재한다. 논리의 준거점을 제시하는 한편, 그것의 파산을 이야기하는 것이 솔직한 선택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쓰리: 아직은 끝나지 않았다>의 의도인지는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소련 령 카자흐스탄의 역사에 대해 내가 너무 무지하기 때문이다. 화면에 지속적으로 걸치는 그래서 외려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찰서에 걸린 통치자로 보이는 인물을 내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강변하는 종교와 살인마가 읽은 오컬트가 어떤 종교 유파의 흐름 속에 있는지 내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반복컨대, <쓰리: 아직은 끝나지 않았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도저히 몰랐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반복컨대, 이것은 (의외의) 미덕이다. 우리는 잘 알지도 못할 때만 도덕적일 수 있다.

 

두 장면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자. 영화의 거의 첫 장면, 주인공 셰르는 초점 바깥에서 초점 안으로 걸어 들어온다. 그리고 수습으로 일하게 되었다고 이야기 한다. 영화의 거의 마지막 장면, 셰르는 일련의 사건을 겪고 초점 없는 눈으로 하늘을 바라본다. 그러므로 <쓰리: 아직은 끝나지 않았다>를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영화는 셰르가 사건의 시각 바깥에서 들어와, 시각 자체를 잃게 되는 이야기다.

 

 

-오오극장 관객프로그래머 금동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