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밥 먹여 준답니까
복싱하는 청춘남녀가 등장하는 <신림남녀>의 추천사 서문을 쓰기 위해 머리를 굴리던 중 무하마드 알리ㅡ전설적인 복싱선수ㅡ의 명언이 떠올랐던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네 꿈이 만약 너를 두렵게 하지 않는다면, 그 꿈은 충분히 크지 않은 것이다....” 야, 역시 언제 들어도 멋있어.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어쩌구, 하는 것보다 훨씬 괜찮잖아! 그런데 봄바람이 살랑거리는 요즘 같은 날이면, 겨우내 얼었던 뇌까지 녹아 말랑해진 건지 나는 괜히 세상을 다각도로 바라보며 삐딱선을 타고 싶은 상태가 된다. 근데요 알리 선수님. 만약 그 꿈이 정작 저보다 더 크게 느껴지면 어떡하죠. 그리고, 꿈을 꼭 두려워하면서 꿔야만 하나요? 두려운 건 싫은데요 저는.
<신림남녀>에서 남녀를 담당하고 있는 소라 (박시연) 와 경호 (정용주) 에게도 물론 꿈이 있다. 소라는 아이돌 데뷔, 경호는 복싱 세계 챔피언을 꿈꾼다. 데뷔를 위한 다이어트. 승리를 위한 신체 단련. 땀내 나는 눅눅한 체육관 안에서 두 사람은 각자의 꿈을 위해 열심히 샌드백을 두드리지만,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은 번번이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는다. <신림남녀>의 힘은 이어지는 그들의 선택에 있다. 에라 다이어트고 뭐고, 계체량이고 뭐고 간에, 다 때려쳐, 먹자! 먹고 죽어 이씨. 꿈은 없고요. 그냥 놀고, 아니, 먹고 싶습니다. 김밥천국에서 참치김밥 오므라이스 냉면 김치찌개를 시켜 폭식을 하던 경호는, 맞은편 테이블에서 돈까스와 쫄면을 폭식하고 있는 소라를 발견한다. 그리고 밥을 뿜는다.
나는 그래서 이 영화가 좋았다. 멋지게 꿈을 이루는 모습과 그 과정도 물론 중요하지만, 꿈을 이루지 못해서 (못할 것 같아서) 힘들고 아파하고 좌절하는 시간도 중요하기에. 때론 나보다 훨씬 더 크게 느껴지는, 그래서 나를 울게 하고 두렵게 만드는 바로 그 꿈에게 지지 않기 위해 결국 우리는 오늘의 밥숟가락을 열심히 입에 퍼넣어야 한다. 그래 뭐 솔직히, 꿈이 밥 먹여주냐? 꿈도 결국 내가 꾸는 거잖아! 그리고 그 내가 살기 위해서, 나는 먹어야 한다고.
<신림남녀>가 당신의 인생을 바꾸거나, 가치관을 변화시킬 영화가 되길 바라지 않는다. 나는 이 영화가 당신에게 밥 한 끼 사주는 영화가 되기를 바란다. 꿈을 이루었나, 이룰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역시 아직 선뜻 대답할 수 없다. 어쩌면 남은 인생 내내 그러할지도. 하지만 꿈은 꿈으로 끝나도 아름다우니까, 그 꿈보다 내가 먼저 끝나면 안 되겠지. 끝나지 않고 뭔가를 이어가고 싶은 의지로써, 나와 당신에게 이 영화를 보여주고 싶다.
- 오오극장 관객프로그래머 최은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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