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프와 이데올로기> 관객과의 대화 기록 2022.12.10
참석 양영희 감독
진행 박문칠 감독
기록 정채연
박문칠 : 오늘 진행을 맡은 저는 대구에서 다큐멘터리 활동하고 있는 박문칠입니다. 저도 감독님을 처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먼저 감독님, 관객 분들에게 인사 말씀 부탁드립니다.
양영희 : 안녕하세요, 양영희입니다. 오늘 대구에 난생처음 와봤는데 이렇게 많은 분들이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박문칠 : 대구에 처음 오신 것이니만큼 우리 관객분들께서도 뜨겁게 환영을 해 주시고 많은 질문과 또 감상으로 함께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관객 분들께 질문을 받기 전에 제가 궁금한 것들, 또 공통적으로 궁금해할 만한 것들을 먼저 질문을 드릴게요. 다들 영화를 보셔서 느끼셨겠지만 상당히 오랜 기간에 걸쳐서 작업을 해오신 것으로 느껴지는데, 이번 작업은 어떻게 시작이 되었고 또 어떤 과정을 거쳐왔는지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양영희 : 언제부터 시작이라고 하기 어려운데, 원래는 어머니에 대한 작품을 만들 생각이 없었어요. 어머니는 아버지처럼 본심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가드가 세다고 할까요. <디어 평양> <굿바이, 평양> 찍을 때만 해도 어머니는 틈이 없는 사람이었어요. 자기 아들, 손자들이 북한에 많이 있기 때문에 북한에 대한 비판이나 또는 아들을 보낸 것에 대한 후회를 일체, 카메라가 없어도 절대 그런 말씀을 안 하셨습니다. 다큐는 카메라 앞에서 솔직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어머니에게서는 그런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이 힘들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어머니도 나이를 드시면서, 실은 이런 심정이었다고, 실은 자기도 많이 울었다, 그런 이야기를 조금씩 하셨어요.
제가 4.3에 대해 맨 처음 알게 된 게 98년이에요. 제주도에서 그런 학살이 있었다고 들어본 적도 없었는데, 오사카에 가서 아버지한테 물어보니까 아버지가 안다고 하셨어요. 오사카에는 4.3을 피해서 오사카로 피난을 온 사람들이 많은데, 서로가 4.3 체험자라는 걸 알아도 일체 말하지 않았고 안 할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아버지는 그래도 1942년에 제주도에서 일본으로 건너 가셨기 때문에 4.3 체험자는 아니에요. 그런 얘기를 아빠랑 하고 있을 때 엄마는 옆에서 아무 말 안 하셨어요. 제가 어머니는 오사카에서 태어났으니까 4.3을 잘 모르시겠네요, 하면 모른다고, 제주도에 가본 적 없다고 하셨어요.
그 후에 제가 한국에 자유롭게 오기 시작하면서, 민주화가 된 한국의 모습을 부모님한테 열심히 이야기를 해드렸어요. 조총련계의 사람들은 한국의 민주화를 기사로 읽지만, 한국에 못 들어왔기 때문에 실제로 어떤지 잘 실감을 못하거든요. 제가 진짜 한국이 변했다, 4.3도 재단도 있고 연구소도 있고 평화 공원도 있고 대통령도 인정했다, 이런 식으로 말을 하니까 어머니도 <디어 평양> 편집 때쯤부터 조금씩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시더라고요. 근데 그때는 너무너무 짧아서 영화에 못 쓸 정도의 증언이었어요.
<디어 평양>을 세상에 낼 때는 재일교포에 대해서도 잘 몰랐어요. 재일조선인이 일본에서의 제일 큰 마이너리티 그룹인데, 그 안에 고향은 남한인데 북한을 지지해서 사는 사람들이 있고, 사실 그들은 재일교포 안에서도 10%가 안 될 정도거든요. 그래서 이걸 어디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4.3은 도저히 여기에 못 넣겠다 싶어서 4.3을 빼고 <디어 평양>을 만든 거예요.
그러다가 2009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까 어머니가 실은 “약혼자가 있었다”고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서, 남자들은 옛날 남자친구 얘기를 듣기 싫어하니까 너도 조심해, 라고 하시면서요. 저는 너무 놀라서 그 이야기들을 조금씩 찍기 시작했는데, 어머니도 60년 가까이 죽여 온 기억이기 때문에 기억이 한꺼번에 다시 나시진 않았어요. 조금 회상하시다가도 너무 힘들고 끔찍하니 하지 말자고, 더 이상 4.3은 묻지 마, 하셨어요. 그래서 찍었다가 못 찍고 찍었다가 못 찍고, 기다리고 기다리고 하다 보니까 7년쯤 흐른 거예요.
그 후에 이상한 일본 남자가 내 인생에 나타났어요. (웃음) 지금 남편이 된 사람인데, 카오루한테 내가 실은 엄마의 이런 증언을 찍고 있다고 하니까 오히려 나보다 그 사람이 이건 꼭 영화로 만들어야 된다고, 너무 중요한 증언이라고 하는 거예요. 카오루도 어머니를 만나러 가려고 4.3에 대한 책을 열심히 읽어서, 오히려 나보다 더 좋은 인터뷰어가 돼줬어요. 어머니는 하도 오랫동안 딸의 카메라 앞에 섰기 때문에 이야기를 할 때 생략을 하셨거든요. 그러면 영화로 만들 때 설명이 부족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카오루는 새로운 가족이고, 거기다 일본 사람이니까 어머니가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주시는 거예요. 자기 어릴 때부터 일본에서 어떤 차별을 받았고, 재일조선인이 어떻게 살아왔고, 제주도에 약혼자가 있었고, 그런 이야기가 좋은 증언이 됐어요. 동시에 어머니에게 있어서는 리허설도 됐고요. 더욱이 저한테서 남한의 변화를 들으니까, 4.3에 대해서 건드리지 말라고, 제주도에 가본 적 없다고 하셨던 사람이 자기도 4.3을 전하겠다, 후대에 이건 전해야겠다, 이렇게 결심을 하신 것 같아요.
카오루가 어머니를 처음으로 만나러 가던 그 날에 저는 이게 장편 영화가 될 가능성을 봤어요. 전 사실 극 영화를 하고 싶었는데, 또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다큐를 시작하나 막막했어요. 그런데 그때는 제주에 뿌리가 있는 가족에게 4.3을 피한다면 가족 이야기를 다 끝낸 것 같지가 않아서 숙제처럼 느껴졌어요. 그래도 어머니가 카오루를 만나는 날에 설마 삼계탕 백숙을 끓이고 환영을 하실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카오루는 그날 저희 엄마가 자기한테 소금을 뿌릴 수도 있다고 각오를 해서 갔대요. 그런데 그날 환대하는 두 사람을 보고 제가 정말, 평화의 길을 이 사람들이 보여주는구나 생각했어요. 음식을 같이 먹고 또 같이 마늘을 까고, 가치관도 사상도 다른데 서로를 존중하는 모습에 저도 감동했어요. 그래서 그날부터 갑자기 내 머리가 막 돌기 시작하더라고요.
어머니는 10대까지의 사진이 한 장도 없어요. 가난했던 것도 있고, 미군의 폭격도 있었고, 제주도에 피난을 갔다가 다시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올 때 짐을 하나도 챙길 수가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어머니의 인생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했을 때부터 젊을 때 어머니는 애니메이션으로 가자고 결정했어요. 그 순간 제가 제일 좋아하는 코시다 미카라는 화가가 떠올랐어요. 오늘 입은 티셔츠도 코시다 미카상이 그려주신 거예요. 그렇게 해서 시작을 했습니다.
박문칠 : 한 사람의 인생을 이해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이런 말씀을 좀 해 주셨습니다. 저도 최근에 위안부 피해를 입은 김수남 선생님의 삶을 다큐멘터리로 만들었는데, 그분도 “내 속은 아무도 모른다 카이”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고 그걸 또 온전히 다른 사람한테 전달하는 게 어려운 일일 텐데요.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 또 한 사회를 이해한다는 것에 대한 감독님의 생각을 좀 듣고 싶습니다.
양영희 : 이 영화를 만들면서 어머니를 이해하게 되셨죠? 하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이해했다고 말하는 것이 무서워요. 전 한 사람을 이해했다고 말하는 것이 너무 거만하다고 생각해요. 물론 영화를 만들면서 그 전보다 훨씬 많이 어머니가 살아온 시대를 배웠고, 어머니가 겪은 4.3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알려고 많이 노력을 했어요. 어머니도 나이를 많이 드시면서 좀 편하게, 나이를 먹은 딸에게 옛날엔 말 못했는데 실은 그때 이랬었다는 이야기도 많이 해주셨고요. 그러면서 옛날보다는 어머니에 대해서 훨씬 많이 알게 됐죠. 저는 원래 어머니가 오랫동안 한국을 미워하고 피해왔다고 생각을 해왔었는데, 어머니를 알면 알수록 제주도를 잊기 위해서 노력을 해오신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어요. 어머니는 끔찍한 과거를 잊어버리고 싶다고 말씀하신 적도 있었지만, 어머니가 열다섯 살에 처음 제주도에 갔을 때 제주도 사람들이 정말정말 잘해 주셨대요. 무엇보다 어머니는 난생처음으로 민족 차별이 없는 데서 생활을 해본 거예요. 일본에서 그 당시에-지금도 그렇지만-조선 이름을 말 못했어요. 일본 이름으로 일본 학교를 다녔던 어머니가 자기 이름을 당연하게 이야기하고 자기 나라 말을 배우는 것이 정말 기뻤다고, 제주도에서 있었던 좋은 추억들도 많이 이야기 해 주셨어요.
4.3에 대한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에 어머니는 한국이 잔인하다고 하셨어요. 저는 ‘북한도 잔인하고 일본도 잔인한데 왜 한국만 잔인하다고 해요?’ 하니까 제주도 가본 적도 없다 하신 어머니가 ‘넌 몰라’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너무 편견이 심하지 않나 생각했어요. 북한을 선택을 해버렸고 또 아이도 보내버려서 반작용처럼 남한을 싫어하시나 생각도 했고요. 근데 아주 최근에 느끼는 것은, 어머니가 얼마나 제주도를 사랑하고 싶었을까 하는 거예요. 자기 부모님의 고향이잖아요. 사실 우리 부모님 나이쯤이면 분단되기 전의 시대를 아시니까 남 아니면 북을 선택하라는 것 자체가 모순이거든요. 선택도 해외에 사는 사람만 해야 하고요. 남한에 사는 사람은 사상이 뭐라도 어쨌든 남한 한국인으로 살고, 북한에 있는 사람은 북한 인민으로 사니까요. 하지만 교포들은 한반도의 분단 또 정치적인 단체의 대립 아래서 선택을 해야 하고, 한 번 선택하면 그쪽을 찬양하고 다른 쪽을 비판해야 했어요. 그 사람들이 스스로 선택했다고 말하면 자유로웠던 것처럼 들리는데, 선택을 하면 할수록 점점 자유가 없어지는 시대를 사셨다는 것도 많이 느꼈어요.
그렇게 어머니의 4.3 증언을 몇 년 동안 찍고 있었는데, 타이밍 좋게 제주 4.3 연구소 분들이 오사카의 어머니 집에 오셔서 인터뷰를 하셨어요. 그때 어머니는 4.3을 후대에 전하는 사람으로서의 각오가 되어 있어서, 쏟아내듯이 이야기를 하셨어요. 영화에는 7분 정도밖에 못 냈지만, 실은 3시간 반쯤 대연설을 하셨어요. 저는 그날 어머니가 얘기를 너무 많이 하셔서 쓰러지는 줄 알았어요. 그리고 그때 카메라 밖에 계셨던 4.3 연구소 분들이 어머니가 말하는 단어나 사람 이름이 정확한지 그때그때 온타임으로 제주에 있는 4.3연구소에 보내서 확인하고 계셨는데, 그게 다 맞더라고요. 그래서 4.3 연구소 분들도 어머니가 70년 전의 일을 정확하게 기억을 하시는 것에 너무 놀라셨고, 정확하다고 하니까 어머니도 신이 나셔서 더 자신 있게 얘기를 하셨어요.
그 인터뷰를 마치고 어머니가 정말 시원하다고 하시면서 생맥주를 아주 맛있게 드셨는데, 다 쏟아내서 해방감을 느끼시는 것 같았어요. 그때부터 저는, 어머니는 다 말했기 때문에 어머니의 몫을 다하셨고, 이걸 작품으로 만든다든지 기록을 남기는 건 우리의 몫이구나, 막연하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제주도에서 알츠하이머가 갑자기 심해진 어머니한테 이제 잊으셔도 된다, 한 것은 이제는 우리가 기억하고 기록하겠다는 결심이기도 합니다.
박문칠 : 많은 얘기를 들려주셨는데, 우리가 본 영화 속 장면보다 훨씬 오래 준비를 해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저런 장면을 볼 수도 있고 또 역사가 그런 증언을 갖게 될 수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도 사실은 캐나다 교포인데, 어렸을 때 어른들이 교회가 갈라졌다고 얘기하시길래, 진짜 건물에 금이 가서 갈라졌다는 건 줄 알았어요. 하나님 믿는 교회는 하나인데 왜 그게 나눠지는지 이해를 못한 거죠. 나중에 커서 보니까, 목사와 장로님이 친북적인 성향의 분들과 친남적인 성향의 분들로 갈라졌던 거였어요. 교포 사회는 항상 그런 갈라짐이 있어서, 오히려 외국에서 통일을 더 바라기도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도 디아스포라로서 이 영화가 반가웠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질문을 한 가지만 더하고, 관객 분들이 남겨주신 질문으로 넘겨볼 텐데요. 저도 교포로서도 그렇고 여러 가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사적인 다큐멘터리로 풀어보았는데, 감독님은 벌써 세 작품을-사실 극 영화 <가족의 나라>도 어떻게 보면 비슷하게-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계속 붙잡고 해오고 계시잖아요. 감독님께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사실 가끔은 도망치고 싶을 것도 같은데, 근데 또 정체성이 자기한테 붙어 있기 때문에 또 도망갈 수도 없는 것 같기도 해서, 어떤 의미인지 좀 여쭤보고 싶습니다.
양영희 : 정체성 이야기가 나오면 많은 경우 마이너리티라고 분류되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정체성을 고민한다, 추구한다, 찾는다, 뭐 이런 말을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한 사람이 카테고리에 따라서 마이너리티도 될 수 있고 메이저리티도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일본 안에 있는 일본인이 아닌 사람이니까 이런 식으로 분류하면 마이너리티지만, 일본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분류하면 메이저리티거든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 항상 모든 측면에서 마이너리티인 사람은 없어요. 정체성은 쉽지도 않고 규정 지어서 말도 못해요. 그 사람이 어떻게 사냐 하는 문제니까요. 또 어떤 부모 곁에서 어느 나라 어떤 시대에 태어날지 하는 부분은 자기가 선택을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하지만 그에 기초해서 그 후의 인생은 자기가 결정을 해갈 수 있잖아요. 그래서 저는 정체성은 구축을 해 가는 것, 자기가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저를 설명해보자면, 태어나 보니 일본이었고, 그런 부모였고, 또 제가 64년생입니다. 제가 나이를 말하는 것은 에이지즘이 아니라, 제 세대나 시대를 여러분이 파악을 하시라는 거예요. 저는 어릴 때 조선학교에 다녔어요. 조선학교 다니는 애들도 학교 안에서는 조선 이름을 쓰지만, 학교 밖에 가면 차별받기 싫어서 일본 이름을 많이 써요. 옛날에 내 친구가 골프장에 가서 한국 이름을 썼더니 일본 이름을 쓰라고 했대요. 왜냐고 물으니까 “골프는 신사의 스포츠입니다.” 그런 시대였어요. 많은 교포들이 싸웠고, 한류도 있고, 한국이 경제적으로도 발전하다 보니까 최근에는 한국 이름을 당당하게 쓰는 교포들도 많아졌지만, 여전히 보수적인 부분이 남아 있어서 직장이나 학교에서 차별을 당합니다. 저는 조선학교에서 대학까지 나오고 조선학교 선생도 조금 했어요. 20대에는 연극 활동을 하고 30대부터 제가 라디오나 뉴스 시사 쪽에 가면서 카메라를 들고 찍기 시작했는데, 제가 처음으로 라디오와 TV에 나왔을 때부터 정말 방송을 나갈 때마다 꼭 협박 전화가 와요. 집에 있는 자동 응답기에 건방지게 조선인이, 그것도 여자가 일본 TV에 나오냐, 밤길 조심하라, 가만히 두지 않겠다, 그런 말이 항상 남아 있어요. 어머니가 아주 걱정을 하셔서 짧은 거리라도 택시를 타라고 돈이 없는 딸한테 계속 이야기를 하셨고. 저는 무서워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더 일을 잘해야겠다, 더 인정을 받아야겠다, 이런 놈들이 그런 말을 못하게 해야겠다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저는 한 측면에서는 아주 당당하고 싶었고, 또 한 측면에서는 북한을 비판하면 안 된다는 교육을 받았고, 그에 대한 반항심도 있었고, 부모님이 조총련 활동가니까 너도 자기 진로를 선택할 권리가 없이 조총련 활동가가 돼야 된다는 학교 선생의 진로 지도를 받기도 했어요. 너무하죠. 그 반항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와 있어요. 지금도 조선학교에서 저는 금기입니다. 조선학교에서는 양영희 작품 보지 말라고 했다고, 학생들이 제 영화 보러 와서 이야기해줘요. (웃음) 그러니까 조선학교의 중요성도 있고 훌륭한 점도 있는데 여러 가지 문제도 있어요. 옛날 북송 귀국 문제도 조선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교육을 해서 보냈고, 제가 작품을 만들면서 그 조직이 덮었던 이슈들을 다시 끄집어내니까 불편해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우리 가족이 이산가족이 됐고 우리 오빠는 죽었어요.
저는 어떤 사람도 없었던 걸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디어 평양>을 보시면 일본에서 열심히 지원하니까 북한에서 적당히 잘 살잖아요. 제 영화는 조총련에서도 비판하지만, 조총련을 싫어하는 사람도 비판을 해요. 잘 사는 집의 영상으로 북한이 좋다는 영화를 만들자는 건가 하면서요. (한숨 쉬며) 영화를 집중해서 내레이션을 들어야지, 나의 영화는 내레이션이 주인공인데. 적지 않은 사람이 처음부터 양영희가 친북 영화를 만들었는지 아닌지 판단하기 위해서 제 영화를 봐요. 근데 영화 보는 방법으로서는 아주 가난하다고 할까, 영화는 그레이 존을 그리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저는 <디어 평양>에서 잘 먹고 있는 조카들이 “할아버지 할머니 고맙습니다.” 하는 모습만 많이 내고 있어요. 보통 북한의 아이들은 원수님 고맙습니다, 장군님 고맙습니다, 라고 하지만, 제 영화에서 우리 조카들은 한 번도 안 해요. 그것은 저의 전신 전력을 다한 야유입니다. 형제나 조카가 인질처럼 있는 상황 속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그 당시 최대의 표현, 반항, 발언이에요.
박문칠 : 워낙 복합적인 정체성을 갖고 계셔서 여러 가지로 설명을 해주신 것 같아요. 일본에서 여성으로서 소수민족으로서, 이쪽에서는 친북이라고 그러고 저쪽에서는 반북이라고 그러는, 중간 지대에 계시면서 느끼는 복잡함을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Q : 4.3 얘기는 후반부인 연구소 사람들이 방문해서 인터뷰하는 장면부터 시작하더라고요. 4.3을 다룬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초중반까지 4.3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계속 어머니와 남편 분이 삼계탕 만드는 그런 장면들을 공들여 찍으셨더라고요. 일부러 그런 장면을 많이 넣으려고 하신 건지 궁금합니다.
양영희 : 장면을 넣는다 안 넣는다는 것은 그냥 이 그림이 좋다, 아니면 필요하다고 느껴서예요. 이건 어머니의 인생을 그린 영화이지 4.3에 대한 영화는 아니에요. 영화를 만들 때는 <디어 평양>이나 <굿바이, 평양>을 안 본 사람들이 본다고 전제하기 때문에, 어머니가 일본에서 태어났고, 조총련을 지지하고 북한을 지지해서 살았다, 남한 출신인데도 아들들을 북한에 보냈다, 그런 엄마라는 설명을 넣어야 해요. 그걸 어떻게 간략하게 전할까 고민하다가 사진을 썼는데, 그 사진 중에 상점가의 횡단막에 ‘영주권을 취소하고 한국 국적을 조선 국적으로 바꾸자’는 횡단막이 있어요. 대단한 시대죠. 그만큼 조총련이 셌다는 거예요. <디어 평양>에서 60%라고 했지만 정말 70% 이상의 사람이 조총련과 북한을 지지했었던 시대가 있었어요. 그렇게 어머니가 살아온 시대를 설명했고. 또 나중에 어머니가 제주도에 갈 때 카오루가 나오기 때문에 이 사람이 어디서 나왔는지 설명이 필요하거든요. 그래서 카오루가 오사카에 엄마를 만나러 갔고, 나랑 결혼해서 제주도에 같이 갔다는 흐름으로 가야 할 것 같았어요.
또 해외에서 상영을 할 때는 4.3을 처음 듣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4.3에 대해서 설명을 해야 했어요. 그래서 애니메이션을 앞에 넣은 거예요. 식민지 해방 후에 소련이 들어오고 미군이 들어와서 분단이 될 때에 제주도에서 단독 선거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와서 집중적으로 학살이 있었다 하는, 막연하지만 그 정도 설명은 들어가야 했고. 그렇다고 제가 이 영화 한 편을 가지고 4.3을 깊이 알려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에요. 그건 도저히 무리니까. 제가 항상 일본 관객 분들한테 오늘 이 영화 한 편을 보고 4.3을 잘 알았다고 하면 안 된다,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얘기해요. 거기부터 여수로 이어지고 한국전쟁까지 가는 거니까. 그래도 적어도 제주 4.3이라는 말만은 외우고 돌아가시라고 항상 부탁을 드리거든요.
이 영화가 엄마와 딸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또 카오루하고 엄마가 나오는 장면에선 엄마와 일본인 사위의 이야기이기도 한 것처럼, 그림으로서 선택을 했다기보다는 그 장면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대화 내용이 줄거리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로 결정을 하는 것 같습니다.
박문칠 : 사실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지만 저희가 이제 시간이 다 되었기 때문에 마무리를 해야 될 것 같아요. 그래도 말씀하시는 과정에서 지금 채팅방에 올려주신 질문들은 어느 정도 자연스럽게 해소가 된 것 같고요. 쓰신 책을 갖고 나오셨는데 책 소개로 마무리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양영희 : 이제 나이가 좀 드니까 체력이 안 따라가서 정말 돈보다 근육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는데요. 세 편의 영화에 다 못 담은 이야기들, 또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서 어떤 장면이 나왔는지 하는 것들을 에세이로 썼어요.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라고 마음산책에서 나왔는데, (표지를 가리키며) 이거 7살 때 접니다. 북한 깃발을 들고 있지만 북한 아이는 아니고, 일본 니가타 항에서 오빠들이 탄 북한에 가는 배를 환송할 때 저예요. 이 날이 시작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사진을 썼어요. 4.3에 대해서도 그렇고 제일 교포 사회에 대해서도, 카메라를 자기 가족에게 들이대는 일에 대해서도 많이 썼습니다. 재밌는 내용이 많으니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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