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림길에서 '우리'를 바라보기
마침내 수능이 끝난 날. 금세 깜깜해져버린 겨울의 하늘을 뒤로하고 낯선 운동장 흙바닥에 힘없이 발을 내디디며 느꼈던 그 길 잃은 기분이 여전히 선명하다. 우리 모두가 서로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기억할 만한, 마냥 유쾌하지만은 않았던 성년 언저리의 감각. 어리둥절하면서 어쩐지 억울하기까지 했던 스무 살 무렵의 그 어설픈 마음을 상기시키는 이야기의 조각들. <성적표의 김민영>에는 그런 것들이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보편의 감정을 동력으로 삼아 영화는 섬세하고도 담담한 리듬으로 러닝타임을 가로지른다.
정희는 민영에게 서운함을 느끼고, 민영이 보여주는 자기모순의 면모가 종종 우스꽝스럽다. 민영에게는 정희가 답답하고 부담스레 느껴진다. 민영은 가끔 자신이 한심스럽고, 정희는 막연함 속을 부유한다. 과거에 무엇을 남겨두고 떠나왔든, 시간은 친구들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내가 민영이었을 때 나는 정희를 어떻게 대했더라, 영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해결될 거라 믿었던 일들은 아주 당연하게도 여전히 나를 얽매이게 했고, 별천지 서울의 지리는 생소하고 낯설었다. 청소나 요리도 잘 못하겠고 금방 심심해져서 혼자 사는 게 어려웠다. 전공은 재미가 없었고 사람들은 날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 모든 걸 정희에게 구구절절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정희에게 내 슬픔을 너무 많이 떠넘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 가끔은 입을 꼭 다물었는데, 그때 정희는 내게 어떤 성적을 줬을까. 정희에게도 이런저런 일들이 많이 있었을 텐데.
이제는 서로 다른 곳에 놓인, 어느덧 벌어져 버린 우리들 사이의 간극에 대해 종종 생각한다. 새로운 사람들을 알게 되고, 알지 못했던 곳에 어느새 익숙해져 낯선 방식으로 뭔가를 해내고, 달라진 말투와 표정으로 어른스러운 처세술을 점차 익혀나가게 될 우리에 대해서.
그래도 여전히 민영에게는 저답다고 밖에 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정희에게 역시 그러하다. 시간이 지나도 흐려지지 않는 그 뭔가가, 너무나 추상적이어서 적확한 단어로 꼬집어 말할 수조차도 없는 그 뭔가가, 우리 각자에게 여직 남아있다면 우리의 만남이 좀 더 지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설사 정답거나 살갑지 못해도 조금만 더 오래. 정희 혹은 민영이에게. 우리를 엮어주던 것이 점점 사라져가도, 그래도 우리는 조금만 더 우리이면 안 될까?
- 오오극장 관객프로그래머 김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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