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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불문! 대구독립영화

배용균의 비밀 노트 #1

장르 불문! 대구독립영화

오오극장은 대구 유일의 독립영화전용관입니다.
대구독립영화의 다양한 방향을 모색하고 독립영화를 사랑하는 대구 관객들과 호흡하기 위하여,
새로운 시선으로 대구독립영화에 접근하는 장, <장르 불문! 대구독립영화>를 연재합니다.
대구독립영화를 주제로 소설, 칼럼, 에세이 등 다양한 장르의 글을 소개합니다.
그 시작으로, 영화사 연구자 금동현이 대구를 대표하는 전설의 영화감독 배용균을 주제로 쓴 글을 선보입니다. 
매주 수요일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배용균의 비밀 노트 #1

 

               2023528

 

스타벅스에서 아메리카노 2잔 마셨다. 나는 어떤 사람을 만나러 대구가톨릭대학교에 와있다. 자기를 ĐC라고 하는데 어떻게 발음해야할지 모르겠다. 위키피디아에 Đ를 검색하면 이렇게 나온다. D with Stroke. 그럼 띠씨?

아무튼 ĐC는 대구가톨릭대학교 앞 스타벅스에 있으면 말을 걸겠다고 했다. “28일 정오에 스타벅스 대구가톨릭점에서 만났으면 합니다. 내가 당신의 얼굴을 압니다.”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무슨 옷이라도 입고 있겠다고 답신을 보냈어야했나?

눈치가 보여서 커피를 두 잔째 시켰다. 두 번째 잔을 마시는 동안에는 꽤 열심히 ĐC로 짐작되는 사람 찾아보았지만,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사람조차 보지 못했다. 몇 시간이 지나도 ĐC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성카타리나관으로 걸어보았다. Dirty Beaches 앨범 『Badlands』에서 True Blue가 나올 때쯤 도착했다. 이십 분쯤 걸은 듯. 오늘 ĐC를 만나면 성카타리나관에 오리라 생각했었는데. 아무튼 건물이 엄청 커서 놀랐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사람이 없었고, 날이 흐려서일까? 건물 안이 꽤 추워보였다. 건물을 두 바퀴쯤 돌아본 다음 귀가.

 

              2023529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ĐC에게 메일을 보냈다.

 

From: likeacomet@naver.com

To: dUCkChil@⏻⏻⏻.com

Sent: 2023-05-29 () 09:03

Subject: Re: 금동현에게

안녕하세요 ĐC. 어제 정오에 스타벅스 대구가톨릭대학교 지점에 갔어요.

혹시 못 알아보신 걸까요? 제가 요즘 살이 빠지긴 했거든요.

ĐC님 만나면 함께 성카타리나관을 갈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비가 조금 왔지만 그까지 산책을 해봤어요.

배용균 감독님이 여기서 강의를 했다고 생각하니 신기해요.

못 봤지만 간만에 산책해서 기분은 좋았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걸까요?

편하신 시간에 꼭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감독님의 노트를 볼 수 있다면 참,

기쁠 것 같아요.

 

금동현 드림

 

메일을 보낸 김에 일주일 전 ĐC에게 받은 메일을 다시 읽어보았다. 배용균 감독의 노트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워서, 아니 거의 설레서 제대로 안 읽었는데금동현이라니.

 

From: dUCkChil@⏻⏻⏻.com

To: likeacomet@naver.com

Sent: 2023-05-22 () 03:17

Subject: 금동현에게

 

금동현군. 오오극장에 갔다가 마테리알에 쓴 글 두 편을 읽었습니다. 시시한 구석이 적잖이 있었지만 옛 한국영화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더구나 대구에 있단 것만은 인상 깊었습니다. 인내심이 있으신가요? 저는 용균이가 효성여대(옮긴이 주: 효성여대는 대구가톨릭대학교의 전신이다.)에서 가르칠 때쯤(걔는 가르친다고 말하는 걸 경멸했어요) 메모를 모아둔 공책이 어딨는지 압니다. , 용균이가 누군지는 아시죠? 관심이 있으면 28일 정오에 스타벅스 대구가톨릭점에서 만났으면 합니다. 내가 당신의 얼굴을 압니다. 말을 걸게요. - ĐC

 

살펴보지 않았는데 ĐC의 아이디는 dUCkChil이었다. 장식적인 대소문자를 무시하고 읽으면 이렇다. 덕칠

 

               202366

 

덕칠에게 메일이 왔다. 간단히 줄이면 장염이 걸렸다고. 설사가 멎지 않아서 연락을 할 수가 없었다고. 그리고 두 시간 후 성카타리나관에서 보자고 했다.

메일이 도착하자마자 연구실을 나와서 대구가톨릭대학으로 향했다. 1시간 20분 정도 걸렸고, 성카타리나관에 도착해서는 한참을 서성였다. 평일 낮이라 많은 사람이 지나쳤지만 이름이 덕칠일 것 같은 사람(덕칠리쉬)은 없었다. 쟤들은 예준, 시우, 도윤, 서아, 지아뭐 이런 이름이 아닐까. 아무튼 화가 나려던 찰나, 기둥에 노란 포스트잇이 하나 붙어있는 걸 보았다.

 

설사 제발. 회화과 사무실 옆 빈 강의실. 가장 낡은 사물함.”

 

재발을 잘못 쓴 건지? 아님 너무 급했던 건지. 제발이라고 쓴 게 제법 웃겼다.

 

막상 성카타리나관에 들어갔는데 회화과는 없었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회화과는 인터미디어 아트과로 개칭했다고. ĐC 혹은 덕칠에 대한 믿음을 점점 거두며 2층에 올라갔는데, 과사무실 옆에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것 같은 강의실이 있었다. 강의실 문을 열어봤다. 암막 커튼이 내려와 있어 밤처럼 어두웠다. 모두 점심을 먹으러 간 사이라 괜히 조심스럽게 됐다.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는데도 이 강의실은 뭔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 이유는 강의실 안에난 데 없이사물함이 그것도희한하게도칠판 앞에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여기서 수업을 듣는다면 칠판이 아니라 사물함만 보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 강의실에 앉는 학생들은 모두 백골이어야 할 것 같았다. 백골의 예준, 시우, 도윤, 서아, 지아. 원래는 번잡했지만 이제는 버려져 조용해진 공간의 으스스하고 쓸쓸한 분위기. 나는 너무 무서워서 얼른 사물함을 열어보았다.

 

거기에는 놀랍게도 갱지로 묶음이 정말 한 권 있었다. 그리고 노란 포스트잇.

 

 

얼굴을 보지 못해 미안하오 동현군. 이 묶음을 챙겨 가시길 바라오.”

 

펀치로 구멍을 뚫고, 보라색(원래는 빨간색이 아니었을까?) 끈으로 묶어둔 갱지 묶음. 물컹하고 한여름인데도 차갑게 느껴졌다. 이런 형태로 보관된 이후 끈이 한 번도 끌러진 적 없는 것 같았다. 조심히 들자 바닥에 새까만 먼지가 있다. 스르르, 끈 조심히 풀자. 갱지 묶음 중간 부분에는 끈의 허연 자국이 남아있다.

 

이게 정말 배용균의 노트 묶음이 맞을까? 손안으로 가져오는 길에 사진 한 장이 떨어졌다.

 

 

이어령에게 받은 사진일까? 처음 본 배용균의 사진이었다.

 

(다시 보니 수비학(數秘學)적인 사진이다. 노태우 이어령 배용균의 머리를 선으로 이으면 밑변이 7 높이가 5, 각도가 91도의 직각삼각형이 될 것 같다. 9175)

 

그리고 첫 쪽에는 이런 육필이 있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이런 걸 하나 만들기 위해 내 삼십대를 몽땅 바쳐왔구나 하는 회한과 절망감

 

 

 

- 글 금동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