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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불문! 대구독립영화

무엇이 영화인지 좀 더 생각해봐야겠지만 영화인 것만은 분명함 #2

장르 불문! 대구독립영화

오오극장은 대구 유일의 독립영화전용관입니다.
대구독립영화의 다양한 방향을 모색하고 독립영화를 사랑하는 대구 관객들과 호흡하기 위하여,
새로운 시선으로 대구독립영화에 접근하는 장, <장르 불문! 대구독립영화>를 연재합니다.
대구독립영화를 주제로 소설, 칼럼, 에세이 등 다양한 장르의 글을 소개합니다.
두 번째로, 대학생 이라진님의 대구단편영화제를 다니며 생각한 것들에 대한 글을 선보입니다. 
매주 수요일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무엇이 영화인지 좀 더 생각해봐야겠지만 영화인 것만은 분명함 #2

 

2b. a의 마지막 부분을 연결부로 삼아 영화에 대해 생각한 것을 이어 가보자

내가 본 영화에는 수많은 이름표와 반드시 맞닿아야 하는 꿈들이 존재했다. 이름을 부르는 행위와 이름표를 붙이는 것은 다르다. 어떤 작품에서 이름을 부른다는 건 그들을 통과하며 자신만의 영화()를 포착하는, 일종의 응시라고 생각한다. 산책하듯 지나간 공간에서 경험한 부딪힘, 이름의 자발적 충돌이 주는 놀라움! 우리는 그것을 이으며 또 다른 구역을 형성하고 걷고 상상한다. 하지만 이름표가 붙으면 예상치 못한 충돌과 오류를 피할 수는 있어도 이름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름표는 작품 내에서 의식적/비의식적인가와는 관계없이 외부-내부를 구분하고 공간적 좌표 주위를 맴도는 무수한 이름()을 파괴하는 도구로 작동한다. 응시가 아닌 외부 시선으로의 변형은 역동적 이미지에 정태적 성질을 주입하며 이미지가 구술하는 언어를 고정된 틀에 떠밀어 가둔다. 미셸 드 세르토는 일상의 발명이란 저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유예된 죽음의 상태에 있는 죽어가는 사람은 사유의 대상 바깥으로 떨어진다. 이때 사유의 대상이란 실행할 수 있는 것과 동일시되는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은 의료적 처치의 가능성이 둘러싼 영역을 벗어나서 무의미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 따라서 그것은 검열되고, 언어를 박탈당하고, 침묵의 수의로 둘러싸인다. 즉 그것은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조금은 어긋남이 있는 의견일지 모르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름을 붙인다는 것에 가까이 자리한’- 은 단어가 차지한 영역이 마모되어 구멍이 뚫린 공간에 다른 이름이 들어와 점유할 수 있음을 허용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름--를 붙인다는 건-‘이름을 부르고 붙임에 대한 가능성을 박탈당한’- 이미 은폐되고 침전되어 접근권을 상실한 죽음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계속해서 (자발성 유무와는 별개로) 지배된 이야기를 외부 시선을 통해 관람하는 것이다. 세계와 나를 매개하는 스크린은 단지 정해진 오류가 출력하는 굳어진 의미, 이야기에 선행하는 이름표가 배열시킨 현실 이미지를 재생한다. 이러한 반복은 형식화된 오류에서 탈구되는 것을 막으면서도 틀에 빠지지 않았다는 착각을 재생산하고 있다. ‘우리는 이야기를 지배하고 있지 않다는 지배된 순환이 주는 건 무엇일까? 그건 벗어나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 혹은 의미론적 상승의 불능이 아닐까? 언어론적으로 전환된 죽음 아래에서 경험 가능한 건 극단적인 표현으로 탈이데올로기라는 이데올로기가 아닐까. 또한, 이름표는 꿈에도 들러붙어 꿈이 되기를 방해한다. 영화제에서 경험한 꿈-이미지는 꿈이 되기를 거부하며 사라지지 않으려 발버둥 치고 있었다. 이 속에 담긴 꿈들은 자꾸만 현실과 맞닿으려 하고, 닿아야만 하며, 반드시 닿을 수밖에 없도록 설계되었다(우리는 설계자가 아닌데 말이다). 꿈과 현실은 절대 평행한 선분 위에서 나아가지 않는다. 꿈이 사라지기를 막는 현실은 꿈의 바깥에 껍데기를 두르고 우리가 또 다른 현실이라 생각하지만 결국은 같은 현실 공간을 감각 하도록 만든다. 망령은 이야기 내부와 연결되어있고 허구와 현실은 철저히 구분되며 꿈이라는 이름표로 현실을 붙잡고 있다. 사라지는 걸 막지 않으면서 사라짐을 바라보는 건 왜 허용되지 않을까? 사라지는 순간을 그 모습을 그 부분들을 기록하며 옮김으로써 (현실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허구세계의 존재 가능성을 지시하는 것이 아닌, 사멸 당하지 않은 물질의 움직임이 토해낸 흔적을 그대로 기록하는 일. 흩어졌다가 응집되기도 하는 부분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적는 일. 재현되는 사물과 재현된 것을 구분하지 않고 재현 그 자체를, 이후에 꿈을 기다리며 사라지는 꿈의 언어들을 이미지로 옮기는 것. 왜 꿈은 어딘가에 닿고 연속되며 매개되어야만 할까? 꿈을 해명하는 일은 꿈과 이름이 부르는 목소리를 들으면 된다. 어째서 꿈이 되기를 허락함-증표를 발급하는 권한을 가진 현실이 강제하는 연결만 기록되는 걸까? 비자발적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꿈의 창발이 단단한 껍데기를 탈각 하는 모습이 궁금하고 흥미로운데 말이다. 그 나아감이 때론 일상적 실천으로 이동되는 옮겨짐이 전하는 가능성()의 표류! 나는 매개 없는 가능성의 만남을 상상하며 기다리는 것이 좋다. 각자의 형태로 둥둥 떠다니며 이리저리 헤엄치는 파편을 모아 마구잡이로 위치시킬 때, 허구만의 이야기를 경험한다. 무얼 부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부르고 있음은 확실한 그런 외침들을.

 

 

4. 그렇다면 영화가 대체 무엇인지에 대하여

앞서 말했듯이 나는 영화와 전혀 관련 없는 사람이고 내부로든 외부로든 어떠한 접촉도 경험하지 못한 채 영화를 보기만 한 사람이다. 만약 영화도 모르는 주제에 아무 말이나 적고 있다고 꾸짖는다면 할 말이 없다. 실제로 모든 작품을 본 것도 아니고 떠오르는 생각을 옮기고 있을 뿐이니까(이에 금동현은 무책임하다며 웃었다). 영화가 대체 무엇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선택된-선택되지 못한 영화에 대해 잠깐 생각했다. 상영은 되었지만, 영화로써 외면받는 영화가 갖는 강제된 선택의 지위에 대해. 자기 책임이라는 단어가 붙는 어떤 종류의 비합리적 행위와 관련된 창작에 대해. 가능성을 배제하는 자유로운 선택에 대해(우리가 무엇을 자유롭게 선택해야만 하는지를 듣고 떠맡게 되는 상황에서). 이 책임이 귀속되는 대상에 대해. 비가시적 영역에 몸을 숨기고 있는 영화, 그러니까 발생한 건 분명한 창작 행위를 멈추도록 내버려 두지 않음에 대해. 창작 바깥에서 영화()계에 묶여 있는 활동가들의 목소리에 대해.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구성한 조직된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며 단순히 희망이란 명명으로 탈출구를 마련해 두기만 하는 일이 옳은지 조금 더 생각했다. 이 흐트러진 체계야말로 껍질만 굳힌 폐허가 아닐까? 텅 빈 안 구멍을 채우려는 사람들은 껍질을 부수고 태우려 들지만, 조작된 힘은 껍질을 꿀로 두껍게 덮고 있다. 외피에 매여있는 사람은 달콤함을 섭취하며 억압된 비명이 울리는 진동은 외면한 채 흐트러진 상태 그대로 외곽을 넓힐 뿐이다. 시대에 너무 잘 맞아떨어지기 위해 인정 증표만을 바라보며 거대한 욕망에서 쓸려 나온 잔해마저 먹어치우는 사람들! 어쩌면 흐트러진 체계 자체가 되어버린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이 순간에도 오직 증표를 위해 살아가고 있을지 모르겠다. 조르조 아감벤은 동시대성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동시대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동시대성이란 우리가 이접 disjunction과 시대착오를 통해 맺는 시대와의 특수한 관계이다. 특정 시대에 너무 잘 맞아떨어지는 사람, 모든 면에서 완벽히 시대에 묶여 있는 사람은 동시대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때문에 그들은 시대를 쳐다보지도, 확고히 응시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 현재의 어둠에서, 우리에게 도달하려고 하지만 결코 그럴 수 없는 빛을 지각하는 것, 이것이 바로 동시대인이 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이다. 그렇기에 동시대인은 드문 존재이다. 그렇기에 동시대인이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용기를 필요로 문제이다. 왜냐하면 그는 시대의 어둠에 확고히 시선을 고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어둠에서 나오는 한 줄기 빛, 비록 우리에게로 향하나 우리로부터 무한히 멀어지는 빛을 지각하는 능력도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동시대인은 지킬 수 없는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자이다.” 다시 한번 억압된 비명을 통과하면서 증표를 태우고자 약속하는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그들이 지닌 동시대성에 대해, 유한한 영역 내부에서 출발점의 무한함에 도달하려 용기를 내는 행동에 대해, 조작되지 않은 힘을 조작당하지 않도록 지키려고 노력하는 자들에 대해…… 무엇보다 중요한 건 희망을 움직이는 힘이다.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부정하여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도록 가두는 구축된 현실로부터 창조 활동 밖으로 내쫓긴 희망-조작되지 않은 힘을 다시 불러오는 것. 우리 앞에서 의미를 상실한 모습으로 고유명사로만 취급되는 단어가 우리 곁에서 동력으로 작용하도록 만드는 힘! 멀어지는 힘을 잡아당기려 애쓰는 존재들의 목소리가 부르짖는 힘! 구축된 폐허를 늘어트려 비워버리면 그 장소는 지킬 수 없는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하는사람들이 실천하는 활동영역이 된다. 이 변혁은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될 수 있는 걸까? 아마도 누군가는 반드시 답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물음을 끝으로 해안역에 도착했다. 역시 나에겐 너무나 어려운 물음이었다는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라는 가정은 이미 제거되었고 영화인 것만은 분명함에도 벗어나지 않았으며 스스로 대답하기를 멈춘 것이다. 국수나 먹고 집에 들어갈까 고민을 하던 중 누군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그건 카스카이스 정신병원에서를 위한 간단한 인터뷰를 요구하는 동구 지부 청년단원이었고, 나는 동료를 만난 반가움에 중구 지부 소속이라고 인사하며 인터뷰를 응하진 않고 바로 도망쳤다. 다행히 집에 도착했을 땐 뒤에서 들려오던 다급한 말들이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전후 상황을 알 수 없는 순간의 외침이 떠올라 여기에 옮겨본다.

마치 필요한 상태인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필요하다.

 

 

일기를 다 쓴 후 반응이 궁금한 나머지 이웃 수가 다섯이 되지 않는 블로그에 먼저 올렸다. 댓글은 딱 세 개가 달렸는데, 일기가 허구면 안 된다는 꾸지람과 영화에 대한 진정성이 없다는 욕과 그래서 영화가 무엇인지 묻는 말이었다. 나는 앞의 두 댓글을 애써 무시하며 무엇이 영화인지 좀 더 생각해봐야겠지만 영화인 것만은 분명하다고 대답했다. 그렇군요. 답을 찾진 못하셨네요. 하지만 se와 진도 대파 버거를 먹은 건 귀중한 경험이 될 겁니다. 다시 달린 댓글에 나는 답을 하지 않았다. 대구 단편영화제 동안 se를 만나기는커녕 어쩌다 마주친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복잡한 마음에 산책을 시작했다. 조용히 걷다가 울리는 블로그 알람이 신경 쓰여 잠깐 공원 의자에 앉아 댓글을 읽었다. 내용은 뻔했다. 답할 자신이 없으면 이딴 글도 쓰지 말라느니, 배움이 부족하다느니, 이상하다느니. 짜증과 비참함이 몰려올 때쯤 안토니우 무라에게 전화가 왔고 나는 그의 번호를 차단했다. 그리고 충동적으로 이웃과 블로그를 없앴다. 한참을 걷는데, 어릴 때 자주 가던 동네 목욕탕 입구에 붙은 여탕 매점 직원 모집 광고지가 보였다. 그걸 가만히 바라보다가 종이를 들고 즉흥적인 이끌림에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일하고 싶다는 말을 하자 주인은 이것저것 그러나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들만 물어보더니 지금부터 매점에 앉아있으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일은 간단했다. 맥반석 달걀과 식혜를 옮기면 되는 작업이다. 가끔 때밀이나 바나나맛 우유를 채우는 것 외에는 귀찮은 일 하나 없는 작업! 더구나 오늘은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멍하니 시계만 보다가 지루해진 몸을 이끌고 음료 냉장고 쪽을 향하던 도중, 나는 화면이 켜진 구형 컴퓨터를 발견했다. 아무도 쓰지 않아 매점 구석에 둔 것 같은 컴퓨터 바탕화면에는 이런 폴더가 있었다.

 

·고려목욕탕 토요상영회 [보존지구]

 

당황스러운 명칭이었다. 왜 목욕탕에서 상영회를 열었을까? 어쩌면 토요일마다 건식 사우나에 잠입해 영화를 즐겨보던 푸시킨 보존지구 가이드가 이 목욕탕을 사버렸을지도 모른다고 그럼 나는 극장을 방문한 산책자가 되는 거고 사람들은 표 대신 때밀이를 구매하며 대체극장-행위자로 변하는 것이다. 혼자서 그럴듯한 상상도 하며 웃다가 그만두고 폴더를 열었다. 예상과 달리 보존지구에는 딱 세 작품만 들어있었다. 에릭 파우얼스 <꿈속의 영화들>, 발리 엑스포트 <보이지 않는 적수들>, 보리스 레만 <나와 존재들을 연결해 주는 것들>. 나는 조심스레 영상을 틀었고 앉은 자리에서 세 작품을 멈춤 없이 다 감상했다. 그리고 이 영화들을 부르는 이름이 마치 위치와 형식이 옮겨지고 변형된 일기 같다는 기이함에 무작정 뛰쳐나갔다. 극장으로부터의 탈출은 어떤 결심을 위한 동작이었을까? 아직도 모르겠다. 하지만 멋대로 시작한 산책에 들러붙는 물질이 비록 표류를 위한 걸음 혹은 폐쇄된 환상이 주는 낯선 감각이었다 해도,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일기를 써야겠다는 마음이다. 그러고 나면 영화는 다시 재생된다.

 

 

-글 이라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