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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불문! 대구독립영화

대구 시네마테크 운동 밑그림 그리기: 이진이와의 대화

 

대구 시네마테크 운동 밑그림 그리기: 이진이와의 대화

 

대구영화발굴단

(금동현, 김주리, 류승원, 이라진, 임준호)

 

 

1990년대는 오늘날 한국의 영화 문화와 제도가 만들어진 특권적인 시기다. 최근에는 다양한 기관·저널에서 1990년대 시네마테크 운동의 당사자를 비롯한 당대의 영화광을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도 지역의 영화 운동은 서울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명 받지 못하고 있다. 이는 서울의 영화 운동이 절대적으로 중요해서가 결코 아니다. 서울은 오직 그 크기(scale)만으로 오늘날 한국에서 중요함의 기준을 독점하고 있을 뿐이다. 서울을 중심에 놓으면 지역은 지방이 되고, 지역의 이야기는 그저 여담이 된다.

 

그러나 그렇게 남겨둘 수는 없지 않은가. 한국 영화문화에서 특권적인 시기: 1990년대가 주목받는 이유는 여럿이다. 누군가는 소위, ‘K-무비’ 운운하며 한국영화의 세계적 성공의 토대로 1990년대를 주목한다. 다른 누군가, 그러니까 우리는 정반대로 오늘날의 한계—산업이 아닌 문화의 위축, 담론의 부재, 수요(관객)없는 공급(영화)—를 되짚기 위해서 1990년대를 들추어본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응당 주변화 된 것, 역사의 진행 과정에서 중심에 합류되지 못한 이야기들이다. 실현되지 못한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한계를 성찰하고 뛰어넘을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한국영화가 정말 망하고 있다면, 다른 한국영화를 실행시켜야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여담이 되어버린 이야기와 사람들을 길게 늘어놓고자 한다. 그것이 지방의+올드+영화광이다.

 

이 글은 본 기획의 초(草)에 해당한다. 앞으로 늘어놓을 여담에 앞서 우리는 과거의 신문 기사에 의존해 1990년대 대구영화의 풍경을 살펴보았는데, 유독 자주 눈에 띄는 이름이 있었다. 그는 ‘이진이’로 1990년대 대구 시네마테크운동의 동력이 된 ‘영화언덕’의 중심 회원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진이에게 인터뷰를 청했다.

 

이하의 글은 2023년 8월 25일 본 모임의 일원인 금동현과 이진이가 2시간 남짓 나눈 대화를 간략히 정리한 것이다. 비록 비유적인 표현이지만, 이 기획은 (지방이라는) 여담의 실천적 가능성을 타진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글 또한 하나의 중심적인 주제—1990년대 시네마테크 운동—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그 전후로 이진이의 생애와 재미있는 일화를 포함하고 있다.

 

 

1. 이진이의 90년대

 

90년대 지역 영화운동을 이끌었던 영화광들은 “주말의 명화 세대”이다. 그들은 《KBS 명화극장》, 《MBC 주말의 명화》를 보면서 영화를 접하기도 하고 극장을 오가며 상영작을 관람하며 스크린이 주는 매혹을 경험했다. 이진이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영화를 TV를 통해 ‘주말의 명화’들을 섭렵하는 한편, 영화를 좋아하는 아버지를 따라 극장에서 어린이 영화부터 〈용쟁호투〉와 〈사망유희〉에 이르는 영화들을 섭렵했다.

 

또한 당시 학교에서 단체관람은 학생들이 참여했던 유일한 문화생활이었다. 그 덕분에 학생들은 영화 관람을 일종의 ‘놀이’처럼 즐기면서 영화에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었다. 이진이는 친구들과 영화를 놀이처럼 즐겼던 때를 회상하며 “영화를 좋아하는 선생님”을 언급하고, “폭력적”임과 동시에 “매력적”이었던 영화 〈스카페이스〉(브라이언 드 팔마, 1983)를 봤던 기억을 떠올리며 폭력적인 장면에는 관대한 한국의 영화심의를 이야기하기도 했다.

 

“몇 년 후에 여름 방학 시작하는 날 우리 학교에서 〈레이디호크〉(리차드 도너, 1985) 단체 관람을 한다니까 대구 시내 모든 학교 애들이 그 영화를 보러 다 온 거야 (웃음)”

 

이렇듯 대학생이 되기 전부터 이어진 영화에 대한 강렬하고 신선한 충격은 대학 생활을 하면서 더욱 단단해졌다. 이진이는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당시 주로 본 영화가 외화(外畫)였음을 밝혔다. 한편 이진이는 한국영화 중에서는 “이상한 영화가 많았다”라며 3S 정책에 맞춰 〈애마부인〉(정인엽, 1982)으로 대표되는 에로영화만이 넘쳤던 시대를 “초토화” 현장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사회의 병폐를 표면적으로 서술하면 심의에 걸려 우회적으로밖에 제작할 수 없었던 그때,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이규형, 1987)와 같은 수작이 있었음은 분명하다고 알렸다.

 

이진이는 소위 88 올림픽이 개최되어 ‘꿈나무 학번’이라고 불린 88학번이다. 80년대가 민주화를 비롯한 운동을 통해 정치를 거대담론으로 정립하던 시기였다면 90년대는 포스트-모더니즘과 함께 ‘역사의 종말’을 고하던 시기였다. 시대의 단절이자 세대의 단절을 아우르는 88학번 또는 근접한 해의 사람들에게 80년대는 “진짜 무서운 시대”이자 국가의 폭력이 지배하던 때였다.

 

그런데 80년대 학번은 상당히 모순적인 부분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80년대 학번은 민주화 운동과 같은 거대담론을 ‘나’라는 개인보다 중요하게 여겼지만, 역사상 “(이전 시대와 비교했을 때) 청소년기를 가장 풍요롭게 보낸” 시절을 겪은 세대였다. 군국주의의 상징인 교복을 벗은 ‘교복자율화’가 이뤄진 시대이자, 청소년기에는 상당한 양의 대중문화를 경험했다. 이러한 모순에서 출발한 생활의 다양화는 오히려 자유로운 생각과 관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한 비료가 되었다. 이 시대적 흐름을 통과한 대학생들은 ‘햇살’(계명대학교 영화패), ‘꿈틀’(경북대학교 영화동아리) 등을 창설하며 활발한 문화 활동을 이어나갔다.

 

학교 외에서도 취미 교류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당시 대표적인 문화 거리인 ‘삼덕동 문화 1가’가 그 예이다. 이진이가 1992년 무렵 드나들기 시작했던 삼덕동 11번가에는 카페 코뮌, 중고음반 가게 우드 맥, 재즈 카페 애쉬드…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다양한 문화 장소가 있었다. 90년대 영화광들에게 삼덕동 1번가는 가벼운 담소부터 영화와 음악, 당시 그들이 향유 하는 문화에 대한 깊은 토론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코뮌” 같은 시공간이었다.

 

“'삼덕동 문화 1가'라고 불리는 그 거리에 드나들기 시작한 것이 아마도 1992년 무렵이었던 것 같다. 그때 삼덕동 1가에는 10평도 안 되는 작은 카페와 중고음반 가게, 갤러리가 드문드문 있었다. 〔…〕 중고음반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낡은 LP음악, 카페에서는 사람 냄새가 가득하고,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모두가 여유롭게 보이던 삼덕동 1가의 풍경. "소극장 하나면 있으면 완벽할 텐데…"라고 했던 어느 친구의 읊조림도 아련하게 들리는 것 같다. (매일신문 2005년 6월 13일 자 「매일춘추-삼덕동 문화 1번가」)”

 

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하고 사람들과 교류했던 이진이가 영화를 의식적으로 감상하기 시작한 것은 대학원 선배와 교류를 시작하고부터다. 당시 이진이는 선배와 함께 ‘열린공간Q’에도 방문했다.

 

대구 수성교 주변에 있던 수성극장을 변형해 1993년 8월 개방한 ‘열린공간Q’는 연극인 김성익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문화 운동집단에 의해 개관된 시설이다. ‘열린공간Q’에서는 한 달에 한 번 이상 영화제가 열렸고, 연극축제부터 대중음악 공연, 반체제적 행사까지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 영화에 한해서 말하자면, ‘열린공간Q’에는 당대의 유명한 할리우드 영화나 비디오 가게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작품들을 상영하고 있었다.

 

당대의 영화광들은 국내에서 접하기 어려운 작품을 보기 위해 법에 구애되지 않는 노력을 했다. 외국 유학을 떠난 사람이 구한 테이프를 직접 번역하거나 스크립트를 구해서 자막을 입히는 방식으로 영화를 보았고, 복사한 비디오를 상영하는 모임이 시네마테크의 효시였다. 그 결과로 ‘열린 공간Q’에는 고정된 관객층이 있었고, 이를 파악한 내부자들이 ‘고정된 관객’을 중심으로 영화모임을 기획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나름대로 갈증이 있으니까 이렇게 영화를 보러올 텐데 〔…〕 그래서 김은희 씨가 오는 사람 한 명 한 명 다 물은 거야. 자주 오시니까. 저희가 영화모임을 만들어보려고 하는데, 참여하실 생각 있으세요?”

 

영남대학교 ‘천마극단’ 출신이자 대다수 프로그램을 기획한 김은희의 권유에 많은 관객이 참여했다. 그 모임의 이름이 앞서 거론한 바로 ‘영화언덕’이었다.

 

 

 

 

2. 영화언덕

 

1993년 문화적 대안공간 ‘열린 공간 Q’가 개관하고 1년 후인 1994년 6월 이진이를 주축으로 김은희의 제안을 기반을 받아 ‘영화언덕’이 발족했다. 대구의 구(邱)의 언덕을 넣은 ‘영화언덕’은 영화이론 세미나 및 토론 그리고 영화감상회를 열었다. 그리고 동명의 무가지(無價誌)인 『시네힐』을 발행했다. 『시네힐』을 발행한 이유에 대해 질문하자, 이진이는 80년대 학번들에게 회지(會誌)가 일종의 문화적 전통이라고 답했다. 『시네힐』은 ‘영화언덕’이 출범한 직후 계간지 형식으로 창간되었다.

 

90년대의 영화광들이 영화를 보는 경험은 지금과는 달랐다. 그 시대는 영화를 구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기 때문에 “전설로 들리고 책에서만 기록된 것”으로 여겨지던 작품이라면 그것이 비록 조악할지라도, ‘움직이는 이미지’라는 것 자체에 감동하곤 했다.

 

이진이는 그 시대의 영화 관람 환경을 〈러브레터〉를 통해 설명해주었다. 당시 ‘불법유통 1위’였던 〈러브레터〉를 복사본 비디오로 보았을 때, 그 화질은 엉망이었다. 이에 따라 정식 개봉 이후 친구들과 함께 영화를 보러 간 이진이는 “완전히 새로운 영화를 보는 것 같았고 세세한 부분을 보니 우리가 다 모르던 것”임을 깨달았다고 밝혔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데, 첫 장면부터 회원들이 난리가 났다”라며 웃음을 짓기도 했다. 극 중에서 주인공인 히로코가 진주 귀걸이를 끼고 있는데, 여러 번 복제를 거쳐 저화질을 가지게 된 비디오를 통해서는 이러한 부분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대 이러한 영화적 체험의 낙차는 그들에게 풍부한 감동과 동시에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제공했던 셈이다.

 

‘영화언덕’은 회원이 늘어남에 따라 ‘아시아 영화의 새로운 흐름’, ‘할리우드 고전 걸작과 애니메이션 영화제’ 영화제 기획도 맡게 되었다. 특히 1995년 주최한 일본·중국·대만·인도 영화 상영회 ‘아시아 영화의 새로운 흐름’은 해금되지 않았거나 불법적으로 복제된 영화의 상영이 공공연하게 허용되었음을 보여준다. 법적으로는 규제하나 행정적으로는 방치하는 영역에서의 문화적 활동이었다.

 

‘영화언덕’과 대학교 동아리가 함께 연 ‘대구 비디오 영상 축제’도 주목할 만하다. 당시 제대로 된 장비가 없고 16mm 카메라를 사용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곳도 없었기 때문에 홈 비디오를 이용하여 비디오 영화제를 개최했다. 이를 통해 〈인서트 코인〉(박순원 연출, 이진이 제작, 1993)과 같은 비디오가 만들어졌다. 촬영 장비의 보급으로 인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서 시작한 모임이 영상 제작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한편 그 당시에는 한국에 영상 산업이 본격적으로 들어왔다. 이에 따라 ‘영화언덕’이 ‘삼성 나이세스 단편영화제 대구상영회’를 주최하기도 했다. 행사에는 후일 한국의 거장이 되는 감독들의 영상 아카데미 졸업 작품 등이 대거 공개되었다. 단편영화제는 “지역 운동하고는 무관”하지만 단편영화의 소개가 가속되고, 영상 산업이 물꼬를 튼 신호 중 하나였다.

 

여하간 이 시기 영화에는 비디오카메라의 보급이 중요한 사건이었다. 기왕에 영화를 만드는데 드는 비용이 대폭 감소하여 프로가 아니더라도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대폭 확대된 것이다. 이진이의 표현처럼 “결국, 장비가 모든 (영화의) 역사를 결정하는 상황”이었다.

 

1996년 4월 ‘영화언덕’은 ‘제7예술’로 개칭했다. ‘영화언덕’을 담당했던 앞의 세대들은 진학·취직 등 생업을 위해 모임을 떠났다. 그러나 이진이는 방송작가로 생업을 지속하면서도 허전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하여 소규모의 공부 모임에서 시작해 주제를 정한 뒤 책으로 남기는 활동을 기획하게 된다. 문화 변혁기이자 “인터넷이 깔리기 시작했던 시기”인 98년 『키노키즈』 창간호가 발행되었다.

 

“IMF 이후에 우리 진짜 힘들었거든요. (……) 그때 한 친구가 벤처 기업을 만들 수 있대요. 기획서만 잘 쓰면 할 수 있대. 계명대학교가 제일 인기 있는 학교 벤처타운이었어요. 그래서 다른 곳을 찾아보니까 영남이공대 있잖아요. 바로 위에 자리가 하나 있었어 〔…〕 ‘그냥 영화 웹진 만드는 거 합시다’ 이러는 거예요. 대책도 없어요.”

 

인터넷이 보급되어 웹이 생겨나기 시작하자 그들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웹으로 우리도 뭔가 할 수 있지 않을까?”였다. 영화토론 모임으로만 끝나지 않고, 종이 잡지에서 웹진으로 도약을 펼치기 위해 회사를 설립한 것이다. 1999년 영남이공대 창업보육센터에서 벤처 기업으로 창업한 이후 웹진을 만들었다. ‘키노키즈’가 만들어진 이후 처음으로 홍보했던 영화는 〈아메리칸 뷰티〉(샘 멘데스, 1999)였다. 개봉하는 시기에 맞춰 영화 시사회를 진행하고 홍보물을 만들어 일종의 ‘마케팅’을 지방에서 시도한 것이다.

 

그리고 이진이는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인 이하영을 알게 된다. 이하영은 당시 시네마서비스에서 일을 하다 잠시 대구에 내려와 극장을 상대로 배급업무를 하고 있었다. 이하영은 매일신문 기자 김중기를 통해 이진이를 소개받고 친분을 쌓아갔다. “이 실장”이라고 불렸던 이하영은 대구에서 극장 일을 맡으며 이진이뿐만 아니라 대구의 영화광들과도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 이진이는 당시 이하영이 "대구에 이렇게 영화광들이 많은 줄 몰랐다", "대구의 영화광들을 만나서 너무 즐거웠다"고 말했다고 했다. 이진이는 "이하영이 대구가 갖고 있는 영화적 저력을 보고 갔던 것이 아닐까한다"며 덧붙였다.

 

이하영과의 만남을 통해 이진이는 후일 한국영화 데이터베이스 회사 ‘디비디비디비닷컴(이하 디비)’에 합류했다. 이하영은 당시 서울의 시네마서비스로 복귀한 상태였는데 시네마테크 1895의 멤버였던 이언경과 함께 ‘디비’의 설립을 주도했다. 이하영·이언경이 만든 ‘디비’에는 서울 지역의 영화광과 대구 지역의 영화광이 모였고 사이트 오픈과 함께 회사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디비’는 80여 년에 걸친 한국영화의 역사를 총망라한 데이터베이스 사이트로 1919년부터 2000년까지 한국영화와 영화인에 대한 데이터베이스와 다양한 읽을거리를 제공했다.

 

이즈음 이진이는 ‘키노키즈’ 멤버들과 함께 ‘키노키즈 닷컴’을 운영하고 있었다. ‘키노키즈 닷컴’은 마이너 영화 전문 웹진이었는데, 이들은 서울과 비견되는 대구라는 정체성을 만들기 위해 “B급 영화의 정서”를 넣어 ‘키노키즈 닷컴’의 정체성을 구축했다. B급 영화뿐만 아니라 영화 촬영 감독 및 조연 배우들에 관한 이야기 ‘조연 배우 열전’, 스포츠 관련 주제와 블록버스터 영화에 대한 글까지 폭넓게 다뤘다. ‘키노키즈 닷컴’은 ‘키노키즈’ 멤버들이 ‘디비’와 합쳐지면서 허브사이트처럼 연결되었다가 나중에는 ‘디비’ 자체의 웹진을 구축하는 것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협회와 영화제 등이 서서히 완비되기 시작하는 2000년이 되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서 더 이상의 질문을 하지는 않았다. 이진이는 ‘당연히’ 요즘도 영화를 보며 지낸다. 이진이는 최근 가장 재미있게 본 영화로 〈파벨만스〉(스티븐 스필버그, 2002)를 꼽았다. 간단한 감상평으로 글을 마친다.

 

“젊을 때는 그게(할리우드 시스템과 스필버그가-옮긴이) 인정이 잘 안 되더라고요. 아니 물론 그 사람 영화 나오면 좀 달려가서 다 보면서 욕하면서 막 보고 그랬거든요. 근데도 되게 좋아해. 지금은 나이가 드니까 더 좋아지는 것 같고. 이번에 <파벨만스>를 보면서 참 행복했어요. 나를 영화광으로 만들어준 감독의 영화하는 시절을 다시 내가 보는 거잖아요. 참 행복했었어.

 

 

P.S. 정은임의 영화음악 다큐멘터리 제작

 

“제가 또 작업했던 게 있어요. 90년대 영화광들의 이야기를 다른 방식으로 한 다큐멘터리가 있어요. 〈정은임의 영화음악〉을 주제로 양우석 감독하고 같이 만든 거예요.”

 

90년대 영화광들에게 〈정은임의 영화음악〉은 가장 중요한 프로그램이었다.

 

이진이에 의하면 심야에 방영하던 〈정은임의 영화음악〉을 “전국의 영화광들이 다 들었다” 또한 “(방송 중에) 정성일 씨가 언급하는 영화들이 되게 난해하고 어려웠어도 다 찾아봤다. 이 사람이 얘기하는 영화가 도대체 어떤 영화일까를 궁금해하는 시네필들이 영화를 보기 위해 곳곳을 다녔다. 시네마테크를 가든지 우리끼리 복사를 하든지.”라고 덧붙이며 〈정은임의 영화음악〉의 중요성을 부연했다.

 

〈정은임의 영화음악〉 방영 10주년이 되었을 때, 이진이는 한때 라디오 방송으로 연을 맺은 양우석 감독과 함께 〈정은임의 영화음악〉에 대한 다큐멘터리 제작을 결심했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이진이는 당시 지역에서 PD를 하고 있던 양우석 감독 함께 다큐멘터리 제작을 결심했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정은임은 당시 청취자들이 보낸 편지를 모두 보관하고 있었고, 이를 이진이가 모두 받았다. 이진이는 정은임에게 가장 많은 편지를 보낸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가장 많이 편지를 보낸 사람은 ‘서영무’였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당시 그는 대구에서 학원 강사로 재직 중이었다. 이진이는 서영무를 떠올리며 “평범한 사람인데 영화를 너무 좋아했다”라고 기억했다. 그는 “〈정은임의 영화음악〉을 들으면서 영화에 대한 것뿐 아니라 자신의 인간적인 성장에 대해서도 꼼꼼하게 기록하던 사람”임을 밝혔다. 이를 기점으로 정성일 평론가, 홍동식 PD, 정은임, 장영희 작가도 출연하여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이진이는 이 다큐멘터리를 〈정은임의 영화음악〉 10주년 기념행사를 축하하며 상영했다고 회고했다. 인터넷을 통해 검색하면 〈정은임의 영화음악〉의 애청자 ‘서영무’가 실존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정은임 본인이 10주년 기념행사 때 다큐멘터리를 상영했다는 이야기를 밝히고도 있다.

 

그러나 이 다큐멘터리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우리 ‘대구영화발굴단’은 이 다큐멘터리가 간절히 보고 싶다. 인터뷰 기사를 공유하자 이진이는 다큐멘터리의 정보를 덧붙여줬다. 누군가 이 다큐멘터리를 찾길 바라 정보를 공유한다. 우리에게 연락이 닿기를.

 

제작: 양우석, 감독: 박경희, 글 구성: 이진이, 촬영: 구재모


양우석 감독  "양우석 감독을 처음 만난 것은 1998년 12월 TBC대구방송 라디오가 개국할 당시였어요. 양우석은 라디오 피디로 입사했고, 저와 함께 심야 영화음악 전문 프로그램을 만들었었어요. 양우석 감독은 방송국을 그만 두고 서울로 다시 올라갔고, 그 후에 제작사를 만들었습니다. 정은임 다큐멘터리는 이때에 기획 제작됐어요. 제작: 양우석, 감독: 박경희 글구성: 이진이, 촬영: 구재모(한국영상대학교 교수)가 제작 멤버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