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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불문! 대구독립영화

대구독립영화 비평 시리즈 - 유리된 배회의 좌표들, <왜행성>

 

장르 불문! 대구독립영화

오오극장은 대구 유일의 독립영화전용관으로 대구독립영화 아카이빙을 위한 작업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매년 <대구독립영화 연말정산>기획전과 책자 『오오카이브』를 통해 대구독립영화를 상영하고 기록합니다.  

이제 물리적 아카이빙에 더해  대구독립영화 한 작품 한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대구영화발굴단 류승원님의 대구독립영화 비평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은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 단편 경쟁 초청작 이호철 감독의 <왜행성>입니다. 

<왜행성>은 12월, 오오극장 <대구독립영화 연말정산>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유리된 배회의 좌표들, <왜행성> 

 

대구영화발굴단 류승원

 

 

 

엄마, 교회, 친구. <왜행성> 속 태양(정다민)은 크게 이 세 좌표들을 돌아다닌다. 서로 떨어져 있는 이 세 좌표들을 물리적으로 태양이 오가는 방법은 아마 지하철일 것이다. 영화의 시작과 끝에 태양은 지하철 플랫폼으로 내려온다. 대중교통의 수단으로 영화에서 버스가 아닌 지하철이 등장한다는 것의 가장 큰 특이점은 햇빛의 유무다. (햇빛을 피하는) 장소로서의 그늘에서 태양은 (유일하게) 한숨을 돌리거나, 가장 중대한 선택을 한다. 이러한 어두운 장소를 찾는 태양의 성향은 영화 내내 이어지는데, 그가 반복적으로 찾아가는 친구 준석(김하늘)이 지내는 여관과 가족으로부터의 실연을 겪은 엄마(안민영)의 방에도 햇빛이 거의 들지 않는다. 또한 자신에게 지원금을 대주고 있는 교회의 예배에 태양은 더 이상 가지 않기로 결심한다-태초에 햇빛이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면 태양의 이러한 선택은 햇빛을 피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자체를 거부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늘이 가득하며 각기 다른 성질을 지닌 이 세 좌표에 머무르기 위해 태양은 무표정한 얼굴을 택한다. 영화 내내 일관된 태양의 무표정한 얼굴은 그가 다른 어떠한 이들과도 융화되지 못하도록 만든다-이 지점에서 정다민 배우의 연기는 탁월하다. 비교적 자신의 감정을 명확히 드러내는 <왜행성> 속의 다른 이들에 반해 태양은 아무것도 표출하지 않는다(혹은 못한다). 자신의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혹은 못하는) 태양은 유리된 채 그늘들을 배회하게 된다. 태양이 자신의 엄마에게 사준 운동화는 안방으로부터 나와 다시 걷길 바라는 마음의 선물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배회하고 있는 태양 자신의 처지에 대한 (자신도 모르는) 은유적인 표현처럼 보인다. 그가 엄마에게 선물을 주며 집을 나간 형이 보내준 돈으로 샀다고 말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형과의 공동의 선물이라며 태양이 엄마에게 운동화를 건네는 순간 그의 무표정한 얼굴은 일순간 흐트러진다

 

이러한 태양과 엄마가 느끼는 슬픔의 원인은 <왜행성>에서 명확히 제시되지 않는다. 단지 우리는 종종 그들에게서 언급되는 아빠와 형의 과거를 비롯한 제한된 정보에서 그 원인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명확한 원인이 없이 결과론적인 상황에 놓여있는 이들을 바라볼 때 우리는 쉽사리 그들의 감정에 동조하지 못한다. <왜행성>의 중심축인 풀-쇼트 또한 영화 속 인물들과 관객 사이의 일정한 거리를 만든다. 그러니까 <왜행성>의 목적은 인물들의 감정에 이입하게 만들기보다는,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는 여러 상황들을 어떻게 인지할 것이냐에 대한 고민이다. 이러한 사유의 형태는 <왜행성>의 가장 큰 성취인 동시에 끝내 지켜지지 않은 약속이기도 하다.

 

 

 

 

엄마가 등장하는 장면들을 살펴보자. 엄마는 슬픈 표정으로 누워있는 모습으로 처음 등장한다. 그는 태양을 거치지 않은 채 곧바로 등장하기에-엄마를 제외한 다른 인물들은 태양을 거쳐야만 등장한다-<왜행성>에서 단독적인 입지를 확보한다. <왜행성>에서 주인공은 태양뿐만 아니라 엄마에게도 할당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태양이라는 인물에 비해 이호철 감독이 엄마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하다는 인상을 받는데, 태양을 자신의 남편처럼 만들어 의지하려는 엄마에 관한 영화의 시선이 사실상 태양이 엄마를 바라보는 방식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심지어 <왜행성>은 오히려 그것을 강화하고 있다. 다시 말해 엄마에 대한 아들의 편향된 시선을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엄마를 주인공으로 주체화하려는 것이다. 그에 반해 <왜행성> 속 다른 인물들은 태양을 통해서만 접근이 가능하며 그의 눈을 거친 시선으로 등장한다. 엄마라는 인물 역시 태양과 함께 있을 때는 태양의 눈을 통해 경유하여 보이게 되지만 (앞서 말했듯) 엄마는 혼자 있을 때도 접근이 가능한 주체이기도 하다. 그러나 <왜행성>은 엄마가 혼자 있는 순간을 그의 실연에 대한 슬픔으로 연장하는데 그치고 마는데 그마저도 모호하다. 특히 죽음을 앞두고 태양이 준 운동화를 신고 나와 거실을 배회하는 엄마의 장면은 쇼트의 지속시간과 배우의 연기에만 기대는 이 영화의 가장 모호한 장면임에도, <왜행성>은 뻔뻔하게 그것을 안다는 듯 주체화하여 재현한다. 거기서의 장면은 유달리 무기력하다는 인상을 주는데, 어쩌면 그 무기력함이야말로 엄마라는 인물에 대한 태양의 사유이자 영화의 사유일 것이다. 그 순간 엄마는 자신의 무기력에 영화-주인공의 것까지 떠안는다.

 

주인공-영화의 시선으로 그려낸 엄마라는 인물은 그렇게 통합되며, <왜행성>은 그렇게 축소되고 만다. 거리를 두고자 했으나 사적으로 개입되는 엄마와 관련한 거의 모든 장면들은 감독과 태양 두 주체의 슬픔으로 가득 차 과잉되며 변별력을 잃는다-혹여나 이호철 감독이 그러한 명확한 한계를 인지하고 엄마라는 인물을 재현하고자 했다면 개인적으로 나는 그 선택이 오만하다고 생각한다. 태양은 엄마의 죽음을 마주하게 되자 그의 무표정을 더욱 공고히 한다. 뒤이어 그는 남은 두 좌표 교회와 친구마저 떠난다. 자신이 배회하던 세 좌표들을 잃고 태양은 그렇게 왜행성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