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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불문! 대구독립영화

다른 나라에서: 나의 영화제 기행 - 박진용 감독


장르 불문! 대구독립영화

오오극장은 ‘독립영화의 창작과 비평의 토대에 관한 몇 가지 질문과 제안들’[개관 8주년 행사], ‘대구 시네마테크 운동 밑그림 그리기[매거진 삼사오오 연재]’ 등 오늘날의 독립영화를 돌아보는 작업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에 돌아보는 작업과 겸하여 혹은 그러한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한국 독립영화 감독들에게 조금 더 능동적인 태도를 요청하고 실천적인 팁이 될 수 있을 두 글을 함께 읽고자 합니다.

첫 번째 글은 〈경기도의 어느 남향 집〉으로 ‘스페인 팜플로나에서 열리는 푼토 데 비스타(Punto de Vista)—나바라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다녀오신 박진용 감독의 「다른 나라에서: 나의 영화제 기행」입니다. ‘다른 나라’의 유익함과 ‘우리나라’의 관성을 꼼꼼히 읽고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다음 글은 〈부모 바보〉를 자체 배급한 정보라 제작자의 「RE: 극장 상영 문의 드립니다.」입니다.]

 

 

다른 나라에서: 나의 영화제 기행

 

 

00. 박진용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했고, 2023년 졸업영화 작품으로 <평화>를 연출했다. <평화>2023년 한국에서 개최된 모든 영화제에서 탈락했고, 모든 배급사로부터 배급 의뢰를 거절당했다. 그다음 해에 완성된 두 번째 연출작 <경기도의 어느 남향 집>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공개됨으로써 첫 데뷔작이 되었다. 이후, 이 영화는 스페인 팜플로나에서 열리는 푼토 데 비스타(Punto de Vista)나바라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상영됐다.

 

01. 경기도의 어느 남향 집

2024년 봄, 나는 <경기도의 어느 남향 집>(이하 <경남집>)이라는 제목의 장편 영화를 연출했다. 제목에서 쉽게 추측할 수 있듯 이 영화는 당시 거주 중이던 본가를 배경으로, 가족들이 출연하는 작은 규모의 영화다. 나는 잠깐 출연하는 것에 더해 연출, 촬영, 사운드, 믹싱, 색보정, DCP 제작 등 영화 제작과 배급에 필요한 거의 모든 공정을 담당했고, 가끔 조명을 사용해야 하는 장면이나 편집본에 대한 피드백이 필요할 때는 동료이자 동반자인 강지효 감독의 도움을 받아 영화를 완성할 수 있었다. (영어 자막 감수를 담당한 마크 브라질Mark Brazeal이 이 영화의 유일한 고용 스태프다)

 

영화 제작만이 아니라 배급까지 직접 하기로 결정한 것에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배급을 위한 예산이 없는 데다, 별다른 인적 네트워크도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영화제 서킷이 실제로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고, 스스로 생각하기에 배급사들이 <경남집>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나름의 확신도 있었다 (모든 쇼트가 고정 쇼트인 데다가 쇼트의 지속시간이 평균 1분을 넘어가고, 인물들이 대화를 거의 하지 않는 영화를 좋다고 할 국내 배급사가 과연 있을까?). 이는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직전에 연출한 <평화>가 그해에 개최된 모든 영화제와 배급사로부터 거절당하면서 자연스럽게 체득한 것이기도 하다.

 

영화제에 영화를 출품하는 일은 각 영화제가 어느 시기에 개최되고, 언제 출품 공모를 시작하는지를 일일이 파악해야 하는 번거로운 과정을 제외하면, 그다지 어려운 게 없었다. 영화제 출품을 시작할 당시 나는 <경남집>이 왠지 잘 될 거 같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가득한 상태였고, 별다른 리서치 없이 내 머릿속에서 이름으로만 알고 있는 유명 영화제들(로카르노, 산 세바스티안, 토론토, 전주, 부산,)에 출품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선정 탈락 메일이 한두 통 쌓이기 시작하면서 점점 현실감각을 되찾을 무렵, 한 통의 메일이 도착했다. ‘<경기도의 어느 남향 집> 16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에세이 부문 초청 및 제반 안내’. 드디어 내가 연출한 영화가 사람들에게 보여지겠구나 하는 기대감과 함께 기쁜 마음으로 초청 수락 메일을 보냈다. 동시에 이제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만 상영될 수도 있겠구나라는 왠지 모를 찜찜함이 느껴졌다.

 

 

02. DMZ

초청 수락 이후 상영 일정에 대한 안내와 함께 GV 참석 여부를 알려달라는 메일을 받았다. 사실 메일을 받기도 전에 마음속으로 GV는 절대 하지 않으리라 다짐한 상태였다. <경남집>이 별도의 정보나 설명이 필요한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한 것도 있었고, GV에서 창작자, 특히 감독이 상영이 끝난 뒤에 관객을 앞에 두고 영화에 대한 설명이나 해석을 늘어놓는 게 별로 좋게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별도의 인터뷰를 진행하여 영화제 홈페이지나 카탈로그에 싣는다거나 영화가 수차례 상영된 후에 GV를 진행하는 거라면 모를까? 영화를 최초로 공개하는 자리에서 창작자가 그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건 적어도 내겐 오히려 영화에 대한 여러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고 오히려 영화를 보면서 떠올린 물음들을 즉각적으로 해소하고픈 욕구에 부응하는 것으로 다가온다. (누구 말마따나 가끔은 영화를 본 뒤 미스터리를 안은 채로 집에 돌아갈 필요가 있다)

 

물론 관행적으로 진행되는 GV가 모두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도 알고, 어느 정도는 감독이 직접 모습을 드러내서 자기 PR이나 어그로를 통해 이미지 메이킹을 하고 영화에 대한 미스터리를 증폭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일단 나는 그럴 수 있는 성격이 절대 아니다. 제대로 못 할 거면 재미라도 있어야 할 텐데! (물론 상상을 해본 적은 있다. 이를테면 영화에 출연한 가족 모두와 함께 GV에 참석한다는 공지를 해놓고, 상영이 끝나면 GV를 돌연 취소시킨 뒤 불가피한 사정으로 게스트 모두가 참석할 수 없게 되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던가)

 

하지만 나 역시 많은 관객이 모였으면 하는 마음도 있고, 피하는 게 꼭 상책이라고 생각지도 않기에 나름의 기획을 준비하긴 했었다. 그건 바로 GV에 영화를 보는 사람 (반드시 영화 평론가일 필요도 없다) 셋 이상을 모이게 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게 하는 것. 감독이 자리에 없으니, 창작자의 눈치를 보면서 겸손한 말만 할 필요도 없고, 꼭 방금 본 영화에 대해서만 얘기를 나누는 게 아니라 언제든지 다른 영화나 주제로 뻗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도 애청하고 있는 카페 크리틱이나 회랑 등의 영화 팟캐스트를 생각하며 떠올린 기획이었다). 내가 직접 게스트 섭외를 진행하고 관련 비용이나 절차도 모두 담당하겠다고 영화제 측에 제안했지만 아쉽게도 끝내 받아들여지지는 못했다.

 

상영 자체는 별다른 게 없었다. 이미 편집을 비롯한 후반 작업을 하며 질리도록 봤기에 영화를 관람한다는 느낌보다는 극장의 분위기를 살피는 기분으로 앉아 있었다. 혹여나 기술적인 오류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노파심에 시선은 스크린을 향하면서도 이따금 영화를 보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나 관람 도중 퇴장하는 관객들로 향했다.

 

그리고 상영 끝난 뒤 GV가 시작됐다. 원래 GV에는 영화의 사실상 주연이나 다름없는 어머니만 참석하기로 했지만, 어쩌다 보니 등 떠밀려 나도 같이 참석하게 됐다. GV의 모더레이터는 <경남집>의 프로그램 노트를 작성하기도 한 이승민 평론가가 맡아주셨다. 이승민 평론가는 <경남집>의 프로그램 노트에 공존 가능한 시스템이 무난하게 작동하는 가족의 집이라고 표현했는데, 영화 속 집에 대한 그러한 시선이 어머니의 감상과도 일치한 덕분인지 GV불편하지않게 진행됐다. 불편하지 않은 상황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상황에서 정반대의 감상들이 오가길 바라는 건 너무 욕심일까? (사실 나는 중간에 보다가 나간 사람들에게도 감상을 듣고 싶다. 그게 의미 없는 쌍욕일지라도. 그러니 이 영화를 조금이라도 본 사람은 부디 왓챠피디아든 어디든 짧은 코멘트를 남겨주길 바란다)

 

DMZ에서의 첫 상영이 끝난 뒤, 다음 일정으로 해외 영화제 프로그래머 및 국내 배급사 관계자와의 비즈니스 미팅이 예정돼 있었다. 원래는 경쟁 부문 상영작을 대상으로 하는 행사지만, 올해는 특별히 비경쟁 부문 상영작까지 대상이 확대되었다고 했다. 미팅은 감독이나 프로듀서가 비즈니스 미팅에 참여하기로 한 배급사나 프로그래머를 지목하면, 영화제 측에서 자리을 마련해주는 식으로 진행됐다. 나는 국내 모 배급사 관계자와 해외 영화제 프로그래머를 포함하여 총 5명과의 미팅을 신청했는데, 최종적으로는 2명의 해외 영화제 프로그래머들과 만날 수 있었다. (아무래도 국내 배급사는 경쟁부문 상영작들을 더 신경 쓰는 걸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미팅은 상당히 뻘쭘한 자리였다. 두 프로그래머 모두 영화를 보지 못한 상태였고, 바쁜 일정 때문에 <경남집>의 남은 상영 역시 못 볼 것 같다고 했다 (추후에 찾아보니 두 프로그래머는 피칭, 펀드, 포럼 같은 인더스트리 행사를 위해 초청된 게스트였다). 영화를 안 봤는데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시놉시스나 감독의 변, 프로그램 노트, 트레일러를 사전에 보고 온 프로그래머는 그나마 왜 <경남집>에 관심이 갔는지, 해당 영화제가 어떤 영화들을 프로그램에 염두에 두고 있는지 등 영화제에 대한 매우 구체적인 소개를 들려줬지만, 아무런 사전 준비 없이 온 프로그래머와의 미팅은 사실상 미니-피칭을 하는 자리가 되어버렸다. 이 영화는 어떤 영화인지, 제목은 무슨 뜻인지, 영화의 소재나 형식이 보편적이라고 생각하는지 등 제작비 펀딩을 위해 피칭을 하는 자리에서나 나올법한 질문들에 대답하면서 스스로 이 상황이 정말 웃기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미팅에 대한 안내 메일을 받았을 때 완성된 영화가 있는데 왜 따로 미팅을 해야 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모든 미팅을 끝나고 난 뒤에도 그 질문이 계속 떠올랐다. <경남집>은 이후에도 한 차례 상영이 남아있었지만, 이날의 기억이 사실상 DMZ에 대한 내 마지막 기억으로 남아있다.

 

 

 

03. 해외 영화제

사실 나는 <경남집>이 국내에서 상영된다면 그곳은 분명 전주국제영화제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재훈의 <Trans-Continental-Railway>나 손구용의 <밤 산책> 같은, 어느 정도는 규격에서 벗어난 영화들이 초청되는 걸 보고 나름의 기대감을 품은 것이다. 하지만 3월 초 무렵, 영화제에서 탈락했다는 것이 기정사실로 되면서, 나는 국내 영화제와 해외 영화제에 동시에 출품하는 방향으로 배급 전략을 수정했다. 국내 영화제만 바라보다가는 <경남집>을 소개할 기회가 아예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당시에 알고 있는 해외 영화제라곤 기껏해야 로카르노나 로테르담, 산 세바스티안 같은 소위 상위 티어(tier)의 영화제가 전부였기에 좀 더 많은 영화제에 대한 조사를 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우선 <경남집>과 비슷한 제작 환경에서 제작된 영화나 조금이라도 형식상의 접점이 있는 영화를 떠올려 보면서, 그 영화들이 어느 영화제에서 상영되었는지를 찾아보았다. 이런저런 영화제들에 대한 정보를 모으면서 자연스레 영화제들이 공유하고 있는 어떤 규칙이랄지 흐름 같은 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월드/인터내셔널 프리미어를 하는 영화들로 경쟁섹션을 구성하고 베를린이나 칸 같은 유명 영화제들에서 상영된 화제작을 모아놓은 섹션을 꼭 하나 마련하는 식인데, 사실 이는 국내에 있는 전주, 부천, 부산국제영화제들과 비교했을 때도 별다른 차이가 있는 건 아니다. 다만 한 가지 차이라면 아시아 영화가 생각 이상으로 잘 안 보인다는 것이다. 그나마 찾아볼 수 있는 것도 전쟁이나 젠더, 디아스포라 등의 사회적 이슈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영화가 대부분이고, 그걸 제외하면 그나마 단편 길이의 실험영화들 사이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영화제에 대한 정보를 수집할 때 아시아 감독들의 홈페이지를 일일이 찾아 참고하는 게 큰 도움이 됐는데, <경남집>이 상영된 푼토 데 비스타(Punto de Vista) 역시 손구용 감독의 홈페이지를 통해 <밤 산책>의 상영 이력을 살피면서 알게 된 영화제였다.

 

04. 푼토 데 비스타

푼토 데 비스타에 초청을 받은 건 DMZ 이후 약 2달 뒤인 12월 경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푼토 데 비스타에서 어떤 영화들이 상영됐는지에 대한 이력만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는데, 전체 프로그램이 공개된 후 살펴보니 푼토 데 비스타는 유럽 내의 다른 (다큐멘터리) 영화제들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남다른 영화제였다. 일단 피칭, 펀드, (lab) 같은 인더스트리 행사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다른 영화제들처럼 경쟁부문이 있기는 하지만, 여타 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사회적 이슈를 직접적으로 다루거나 자전적인 이야기를 내세우는 식의, 시네마 베리떼나 다이렉트 시네마로 분류될 수 있는 (주로 IDFAHot Docs에서 주로 상영되는) 영화들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아니 아예 없었다. 더욱이 초청된 17편의 영화에 대해 따로 단/장편을 구분하지 않는 것 역시 흥미로웠다 (또한 경쟁작 중 월드/인터내셔널 프리미어가 절반뿐이고, 이미 스페인 내에서 상영된 영화도 초청한다는 점에서 프리미어를 얼마나 신경 쓰지 않는지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어느 영화제에서건 흔히 볼 수 있는, 그해의 화제작들을 모아둔 섹션 같은 것 역시 없었다. 경쟁부문과 3개의 회고전 정도가 영화제의 메인 프로그램이자 이벤트인 셈이다.

 

나는 운이 좋게도 영화제 측에서 여행 경비와 숙박비를 지원해 준 덕분에 영화제에 직접 방문할 수 있었다. 사실 서구권 영화제에서 관객의 반응이나 GV 진행이 국내보다 확연히 나을 거라는 기대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 같은 대도시가 아니라 팜플로나라는 스페인 북서부에 위치한 인구 20만 남짓의 소도시에서 이런 종류의 영화제가 어떻게 19년 간 유지될 수 있는지, 누가 영화제의 프로그램을 구성하는지, 그들은 왜 <경남집>을 초청한 건지, 다른 상영작들은 어떨지에 대한 궁금증이 더 컸고, 창작자보다는 좀 더 관객에 가까운 마음으로 영화제에 방문했다.

 

팜플로나에 도착하자마자 영화제 측의 안내로 점심식사를 위해 식당에 갔다. 재미있는 건 식사를 천천히 하는 문화 때문인지 상영 일정이 점심시간인 오후 2시를 중심으로 명확하게 나뉘어 있었다. 이를테면 오전 상영은 1330분 전후로 끝나고, 16시에 오후 상영이 시작되는 식이었다. 게다가 영화제에 참석한 게스트와 스태프 모두 같은 식당과 호텔에서 식사를 하는데, 이런 이유로 조식을 먹으면서 각자 오늘 볼 영화 스케줄을 공유하고, 영화를 본 뒤에는 점심을 먹으면서 방금 보았던 영화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가 곧바로 오후 상영을 보러가는 식의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더욱이 자격에 따라 출입을 제한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일반 관객 역시 이러한 분위기에 동참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조금은 생경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경남집>의 프로그램 노트를 써준 푼토 데 비스타의 선정위원이자 영화감독, 비평가로도 활동하는 파블로 가르시아 캉가(Pablo García Canga)와 만날 수 있었는데, 존 포드라는 공통적인 관심사 덕에 그와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고, 사실상 3일 내내 파블로와 동행하며 영화를 보고, 영화에 대한 얘기를 나누며, 영화제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난생 처음 프레스 컨퍼런스에도 참석할 수 있었는데, 이후 컨퍼런스에 참석한 사람들이 팜플로나가 속한 바스크(Basque) 지방 신문/방송사에서 취재 온 사람들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인터넷에도 <경남집>에 대한 짧은 리뷰들이 올라와 있어서 찾아 읽어보기도 했는데, 이런 경험이 한편으로는 익숙한 것 같으면서도 조금 신기하게 느껴졌다. 한국에서도 씨네21 같은 영화 주간지에서 지역에서 개최되는 영화제에 취재원을 보내 리뷰를 쓰고 감독들을 인터뷰하긴 하지만, 오히려 이곳 바스크 지역에서는 그 역할을 지역 신문/방송사가 담당하는 듯 보였다. 어느 날에는 영화제 행사의 일환으로 국영 방송국의 라디오 라이브 녹화가 현장에서 진행되기도 했는데, 기본적으로 지역 영화제에 대한 언론의 관심과 연계가 상당히 밀접하게 느껴졌다.

 

 

 

스페인에서 영화를 관람한다는 건 부족한 외국어 실력 때문에 내용을 이해한다기보다는 말 그대로 보고 듣는 것에 가까운 경험이었다. 그러다보니 평소에 비해 영화의 외연에 대한 생각이 더욱 들었다. 주로 관람했던 경쟁부문의 영화들은 소위 사적인(personal) 영화’, ‘다큐-픽션’, ‘에세이 영화등으로 불리우는, 다이렉트 시네마나 시네마 베리떼 같은 주류 다큐멘터리 형식에서 벗어난 영화들이 대다수였다. 그 다양한 카테고리만큼이나 영화의 기술적인 만듦새도 천차만별이었다. 이런 점에서 대전의 지역청년영상창작자 커뮤니티 INK가 주최하는 FID(Film in Daedeok) 영화제에서 본 영화들이 생각나기도 했다. 실제로도 경쟁작 중에서 기술적으로 제일 형편없는 (달리 말하자면 기술적인 완성도가 곧 영화의 완성도가 아님을 아는) 영화가 지난 3일간 봤던 영화 중에서 제일 좋았기에 그런 인상이 더 강하게 들었던 걸까?. (해당 영화는 안 벤하임(Anne Benhaïem))<민달팽이와 달팽이> (La Limace et L'Escargot)라는 작품으로 이 영화는 올해 푼토 데 비스타 감독상을 받았다).

 

<경남집>은 라몬 발셀스(Ramon Balcells)가 연출한 <A.>라는 10분가량의 러닝타임을 가진 단편 영화와 함께 상영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막연히 짧은 장편(70)과 단편 하나를 묶어서 상영하는 거로 생각했는데, 파블로가 말해주길 두 영화 모두 집이라는 공간을 다루는 영화이기에 같이 놓고 보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더블 피쳐로 구성했다고. (분명 러닝타임을 고려한 것도 맞겠지만) 같은 경쟁부문 안에서 또 다시 상영작들의 배치를 고려하는, 이중의 프로그래밍이 작용했다는 점에서 꽤나 흥미롭게 다가왔다. 상영 전에도 프로그래머가 나와 두 영화를 같이 상영하게 된 이유와 각 영화를 짧게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다. 이런 배경 때문인지 GV와 프레스 컨퍼런스에서도 집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질문이 나왔다. 질문들이 두 영화 사이를 유연하게 오갈 수 있다는 점은 분명 장점이지만, 한편으로는 영화에 대한 편견을 강화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이중의 프로그래밍이 꼭 좋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경쟁부문 외에도 프란스 판 더 스타크(Frans van de staak, 1943~2001) 회고전이 비중 있게 다뤄졌다. 요한 판 데르 쾨켄, 스트로브-위예와 공동으로 작업을 하기도 하고, 그들이 직접 영화사의 미씽 링크(missing link)’, ‘지가 베르토프의 진정한 후계자(only true heir to Dziga Vertov)’ 라고 언급한 프란스 판 더 스타크의 회고전은, 단순한 회고전이라기보다는 재발굴에 가까운 기획이었다. 상영과 강연은 물론이고, 프란스 판 더 스타크의 글과 인터뷰 등을 엮은 단행본도 함께 발간됐는데, 회고전과 함께 감독에 대한 단행본을 발간한다는 점에서 오스트리아필름뮤지엄 총서나 (2005~2011년 사이의) 전주국제영화제 총서가 떠오르기도 했다. 파블로는 이번 회고전이 푼토 데 비스타를 시작으로 스페인 내 여러 도시를 돌며 순회상영될 예정이라고 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감독의 회고전이기에 관객들이 관심을 가질까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정작 객석은 경쟁부문 상영 때보다 더 많은 관객이 몰렸고, 거의 만석에 가까웠다. 이에 대해서도 파블로에게 물어보니 팜플로나가 속한 나바라 주에 있는 교육기관과의 연계로 학생들이 많이 왔을 거라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파블로는 이미 몇 편의 영화를 연출한 감독이기도 해서 영화제에 대한 것뿐만이 아니라 스페인의 영화 제작 환경이나 제도, 문화에 대해서도 많은 얘기를 들려줬다. 한국의 독립영화 감독들이 지원을 받기 위해 지원사업 관계자들이 선호할만한 시나리오나 기획을 하는 것과 비슷하게, 스페인(을 포함한 유럽)에서는 유명 프로듀서를 포섭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한다. 또한 푼토 데 비스타에서 상영되는 종류의 영화를 만드는 창작자의 수는 스페인 내에도 소수이고, 그 관심 역시 대중적인 아트하우스 영화나 상업영화에 비하면 매우 낮은 편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어떤 기반이랄 것이 있지 않고서야 규격에서 빗나간 영화들을 소개하고, 프란스 판 더 스타크 같은 감독에 대한 전국 순회상영을 기획하는 건 어려운 일이지 않을까? 며칠 간의 여행만으로 이 궁금증을 해소할 순 없었지만, 적어도 영화가 공공의 영역 안에 확실히 자리하고 있는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명히 남아있다. 앞서 언급한 영화제와 지역 신문/방송사, 교육기관과의 연계는 물론, 인구 66만의 작은 주(제주도 인구가 70만이다)에도 존재하는 시네마테크, 영화제가 직접 운영하는 어린이 돌봄 데이케어 센터, 청소년 심사위원(Youth Jury), 연령에 따라 구분된 어린이/청소년 프로그램(Mediation Programme) 등 공공성을 확립하고 유지하는 걸 단지 예산 지원이나 관련 정책 같은 공적 제도의 차원에서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영화제 역시 그 역할 분담에 동참하고, 단지 영화를 보여주는 것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관객을 양성하는 것까지 염두에 두는 모습이 그 궁금증에 대한 큰 힌트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05. 그 후

이제 <경남집>은 영화로서 어떤 생애주기를 맞이하게 될까? 올해 가을이 되면 <경남집>의 기나긴 해외 도피(?)도 끝이 난다. 과연 이 영화는 한국에서 극장 개봉을 할 수 있을까? 아니면 대부분의 한국 단편 영화나 미개봉 장편 영화처럼 인디그라운드 독립영화 라이브러리라는 화장터에 안치될까? 그것마저 아니라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까? 한때 나는 한국 독립영화가 개봉하기 위해선 반드시 영화진흥위원회의 개봉 지원 사업이나 국내 배급사와의 계약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었다. 2021년 가을, <경남집>을 막 촬영하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너무 후줄근하게 보이면 어떡하냐는 어머니의 말에 이 영화가 극장 개봉할 일은 절대 없으니 그런 걱정은 안 해도 좋다고 대답했던 게 기억난다. 하지만 촬영을 마치고 영화를 완성하기까지 약 3년의 기간 동안, 이원영 감독의 <희망의 요소>가 인디스페이스에서 단독 개봉을 하고, 김미례 감독의 <열 개의 우물>과 이종수 감독의 <부모 바보>가 별다른 개봉 지원이나 전문 배급사와의 계약 없이 자력으로 극장 개봉하는 걸 보면서 점점 생각이 바뀌었다. (당연히 힘들겠지만) 자력으로 개봉이 가능하다면, 그걸 이용해 영화가 개봉되는 기존의 방식를 바꿔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GV를 포함한 관객 문화나 상영 문화의 또 다른 모습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상상의 연장에서 한국으로 돌아올 <경남집>을 다시 한번 떠올려본다. 태어나자마자 죽는 영화가 아닌, 새로운 관객을 만나 생로병사⽣⽼病死를 통과하는 영화의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