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 불문! 대구독립영화
오늘날 한국독립영화에서 비평critic의 자리는 어디에 있을까요? 제작사와 창작자에게 효능감을 주는 소박한 작품 해설 해설—대체로 작품에 존재하지도 않는 정치사회적 요소를 포착하는 숨은그림찾기—이 아니라, 하나의 작품 혹은 영화 전체에 긴장을 만들고 그리하여 문화의 폐색을 해소하는 날카로운 바로 그것, 비평의 자리는 아주 협소해보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매거진 삼삼오오는 부정기적 연재를 통해 오늘날 한국독립영화에 가능한 비평의 자리를 탐구해보고자 합니다. 잠깐! 그러나 우리는—오오극장이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부터 견지해 온—유행처럼 퍼지는 독립영화의 위기[“이제 와서…?”]를 새삼스레 반복하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위기가 유행이 된 시대에 새삼스레 위기를 부르짖는 것은 죄악이 되는 기회주의, 혹은 小-인플루언서에의 지향이지 비평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평은 캐삭빵에 대한 의지니까요.)
첫 번째 글은 대전청년영상창작자커뮤니티 INK에서 영화제 FID(Film In Daedeok)을 하고 있는 배은열의 「나는 어떻게 다섯 번의 초저예산 영화제를 했고 아직(도) 멀쩡한 (척하고 있는)가」입니다. 오늘날 영화제/글의 비평적 기능 부전의 상태와 틈새, 그리고 대안을 만드는 것의—호들갑을 떨지는 않는!—어려움을 느껴주시길 바랍니다.
나는 어떻게 다섯 번의 초저예산 영화제를 했고 아직(도) 멀쩡한 (척하고 있는)가
배은열 대전청년영상창작자커뮤니티 INK 대표
시작하며 : 비평 말고 실천
“이제 더는 한국영화에서 비평에 대해 말하는 게 그다지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오히려 실천적인 것을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 금동현 영화사연구가 -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지금 쓰고 있는 글을 제안받았을 때 금동현 님과 나눈 대화 속 이 한마디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이 공감하게 된다. 올해 개봉한 《퇴마록》 이야기를 잠시 꺼내고 싶다. 다루려는 건 영화의 완성도나 세련됨이 아니다. 오랜만에 느끼는 목숨을 건 도약이었다. 정해진 예산 안에서 어떤 장면에 힘을 실을지, 제한된 자원을 어떻게 분배할지를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이 보였다. 생존이 아니라,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 더 많은 관객을 만나려는 야심이 감지됐다. 무엇보다도 시장에서 위험과 모험을 감수하겠다는 의지가 또렷하게 느껴졌다. 보기 드문 태도였다.
작년에 개봉한 《아메바 소녀들과 학교괴담: 개교기념일》 역시 떠오른다. 아이돌 캐스팅, 스마트폰의 적극적 활용, 가성비 높은 장르 선택, 클리셰의 비틀기, 그리고 수능 직후 고3과 10대 관객을 겨냥한 개봉 시기까지. 독립영화 규모임에도 관객과 어떻게든 접점을 만들려는 구체적 전략이 분명하게 보였다. 앞서 언급한 두 작품이 참신하게 느껴졌던 이유는 영화 자체의 새로움만이 아니었다. 흔히 말하는 서사나 연출, 미장센의 독창성이 아니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설계된 방식 자체가 신선하게 다가왔다. 영화 외적인 전략, 한정된 자원 안에서의 기민한 선택, 관객과 실제로 만나기 위한 실천이야말로 진짜 새로움이었다. 기발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퇴마록》과 《아메바 소녀들과 학교괴담: 개교기념일》에는 시장의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한 태도와, 기존 방식으로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절박한 자각이 담겨 있었다. 좋은 영화면 언젠가 알아봐줄 거야라는 낭만적 신화는 이제 작동하지 않는다. 한국영화가 점점 관객을 잊고 있는 가운데 누군가는 영리하고 정직하게, 관객과의 접점을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
반면, 봉준호 감독의 《미키 17》은 당혹스러웠다. 관객의 자리가 없었다. 마치 창작자의 일기장을 들여다보는 듯한 영화. 사적인 세계에 갇혀, 관객이나 제작자, 투자자와도 어떤 접점도 맺지 못하는 작품처럼 느껴졌다. 물론 봉준호 감독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한국 영화 전반이 점점 더 관객을 잊어가고 있다. 많은 작품들이 더는 관객을 주요 대상으로 상정하지 않는다. 대신 영화제, 비평가, 제작사를 주요 소비자로 설정하는 듯하다. 더 이상 좋은 영화를 만들겠다는 명분은 설 자리가 없다. 포르노를 찍어서라도 투자받고, 어떻게든 관객을 만나고, 영화를 계속할 방법을 고민하는 창작자. 실천과 절박함이 필요하다.
창작자나 제작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영화제를 운영하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 좋은 작품을 소개하는 일이 아니라, 관객과 어떻게 접점을 만들까? 그리고 관객과의 접점이 어떻게 지속 가능할 수 있을까? 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크고 거창한 이상이 아니라, 작고 유연하지만 실제로 작동하는 관객 경험 말이다. 2025년 한국 영화 필드에서 초저예산 영화제는 더는 흥미로운 실험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유효한 선택지가 된 이유다. 나 역시 세 명의 동료와 함께 FILM IN DAEDEOK이라는 초저예산 영화제를 올해로 5년째 운영하고 있다. 매뉴얼을 제시할 만큼 경험이 풍부하지도 않고, 늘 허덕이고 헤매며 겨우 여기까지 버텨왔다. 누군가에게 감히 충고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지난 5년 동안 반복해서 떠오른 질문들이 있다. 그리고 질문들을 끊임없이 스스로 던지며 일을 이어왔다. 이번 글은 질문들을 정리하고, 조심스럽게 답해보려는 시도다. 정답은 없지만,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좌표는 있다. 질문을 통해 잠시 멈춰 서서 스스로 돌아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 싶었다. 초저예산 영화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언젠가 마주하게 될 현실적인 질문이자, 감당해야 할 선택들에 대한 하나의 대화로 다가가기를 바란다.
첫 번째 질문. 왜 초저예산 영화제를 하는가?
일을 시작할 때는 반드시 왜 → 어떻게 → 무엇의 순서를 따라야 한다. 이유가 명확하지 않으면 방향을 잃기 쉽다.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질문은 결국 왜 하는가에 대한 답이 있을 때만 의미를 갖는다. 모든 실천에는 동기가 필요하다. 동기를 모른 채 방법과 형식만 고민하면, 어느새 수단도 목적도 흐릿해진다. 초저예산 영화제를 기획할 때도 마찬가지다. 가장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은 왜 하는가? 다.
그럴듯한 이유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예컨대 기존 영화제에 대한 문제의식, 비제도권 영화의 소외, 지역 영화 생태계, 아마추어리즘에 대한 긍정, 마이크로시네마까지. 모두 훌륭한 명분처럼 보인다. 실제로 FILM IN DAEDEOK도 언급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명분은 시간이 흐르면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처음에는 사명처럼 느껴졌던 말들이, 결국은 외부에서 끌어온 빌미였다는 걸 깨닫게 된다. 명분은 점점 부담이 되고, 실패했을 때는 죄책감으로 돌아온다. 현실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명분은 오히려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자존감을 흔든다.
처음엔 영화가 좋아서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 영화와의 관계만 망가진 채 끝나버리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소중했던 영화와의 관계를 잃게 된다. 그래서 명분만으로는 부족하다. 초저예산 영화제를 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흥미가 생기고, 돈이 없으니깐. 두 가지 중 하나라도 없다면 굳이 시작할 이유는 없다. 시간과 돈은 모두 소중한 자원이다. 결국, 호기심에서 시작하는 일이어야 한다. 가능성과 욕망이 만나는 지점에서만 지속될 수 있다.
게다가 지금은 영화제 포화의 시대다. 전국 곳곳에서 크고 작은 영화제들이 새롭게 생겨난다. 이름만 붙이면 영화제가 되는 시대. 또 하나의 영화제를 만든다는 건, 무책임한 선택일 수도 있다. 과연 지금, 정말로 하나 더 만들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어쩌면 지금 필요한 건 더하는 일이 아니라, 덜어내고 줄이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질문이 반드시 필요하다. 나는 정말 하고 싶어서 하는가? 즐겁고 행복한 프로젝트가 아니라면, 애초에 시작하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즐겁지 않다면, 언제든 그만둘 수 있어야 한다. 좋은 일이니까, 옳은 방향이니까라는 이유만으로는 부족하다. 지금 나의 조건과 환경 속에서 초저예산 영화제라는 선택이 과연 최선인가를 점검해야 한다. 생각을 앞세우지 말자. 생각하는 대로 살기보다, 사는 대로 생각하며 길을 찾아야 한다.
두 번째 질문. 친구가 많은가?
영화제란 기본적으로 일정 기간 동안 다양한 영화를 연속적으로 상영하는 행사다. 간단한 정의 안에는 몇 가지 전제가 포함돼 있다. 어떤 영화를,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보여줄 것인가. 즉, 타깃 설정, 프로그램 구성, 상영 방식(오프라인/온라인), 행사 포맷 등 전략적 기획 요소들이 자연스럽게 따라붙는다. 자원이 있고 경쟁이 존재할수록, 관객 · 콘텐츠 · 플랫폼의 조합은 성공의 핵심이 되기에, 목표 설정은 일반적인 영화제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초저예산 영화제는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 고민 자체가 사치에 가깝다. 아무리 고민해도 선택지가 늘어나지 않는다.
예산도, 시간도, 인력도 한정된 상황에서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보다는 무엇밖에 못 하느냐? 를 먼저 따져야 한다. 타깃을 설정하기보다는, 올 수밖에 없는 사람이 누구인지 파악하는 편이 훨씬 현실적이다. 홍보 예산은 턱없이 부족하고, 상영작에 정당한 상영료를 지불할 여력도 없다. 외부 관객을 유입시킬 유인책을 마련하기도 구조적으로 어렵다. 결국 초저예산 영화제에서 관객이란 관계로 이루어진 사람들이다. 기획자의 지인, 상영작에 참여한 감독 · 배우 · 스태프의 지인, 제작 과정에서 함께한 협력자의 지인, 극히 드물게 유입되는 완전한 외부 관객까지. 이 네 겹의 관계망이 관객 구성을 이룬다. 일종의 케빈 베이컨 게임이자 다단계에 가깝다.
내가 누구를 부를 수 있는가, 내가 부른 사람이 또 누구를 데려올 수 있는가가 영화제의 전체 스케일을 결정한다. 결국 핵심은 이 질문이다. 내 부탁에 하루를 내줄 사람이 몇 명이나 있는가? 평범한 질문이 초저예산 영화제의 현실적 규모를 가장 정확히 보여준다. 어떤 영화를 틀지보다, 누가 보러 올지를 먼저 묻는 편이 훨씬 합리적이다. 아무리 뛰어난 프로그램이라도 관객이 없다면 공허하다. 그래서 초저예산 영화제에서는 일반적인 기획의 순서가 역전된다. 보통은 콘텐츠 → 홍보 → 관객의 흐름으로 이어지지만, 여기서는 관객(관계) → 형식 → 콘텐츠의 순서로 기획이 진행된다. 누가 올지 대략 감을 잡은 후, 규모에 맞춰 좌석 수, 프로그램 수, 상영 방식, 행사 포맷을 조정하는 식이다.
관객은 보고 싶어서 오는 존재가 아니다. 관계를 통해, 또는 관계에 의해 오도록 만들어진다. 부탁, 의리, 연대감, 은근한 압박까지 모든 방식이 동원된다. 티켓을 유료화하면, 관계의 밀도는 더욱 중요해진다. 무료일 때는 호의로 올 수 있지만, 돈을 지불해야 한다면 보다 강한 설득력과 신뢰가 더 필요하다. FILM IN DAEDEOK도 처음엔 단발성 행사로 출발했지만, 이후 제작 워크숍, 연기 워크숍 등으로 확장해 나갔다. 이유는 분명하다. 커뮤니티가 없으면 관계는 반복되지 않고, 관계가 반복되지 않으면 관객도 반복되지 않는다. 관객은 결국 관계가 전환된 형태다. 신뢰와 감정이 쌓인 관계만이 실질적인 관객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래서 초저예산 영화제를 시작하려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질문은 나는 친구가 많은가? 내 친구들을 고생시켜서라도 이걸 해야 할 만큼 절박한가? 다소 기이하게 들릴 수 있지만, 동시에 매우 현실적인 질문이다. 초저예산 영화제의 기반은 결국 인간관계 자본이다.
세 번째 질문. 당신이 없어도 당신이 기획한 초저예산 영화제는 유지될 수 있는가?
지속 가능한 영화제란 무엇을 의미할까? 핵심은 단 하나, 재생산 가능한가? 이다. 지속이란 그저 오래 살아남는 일을 뜻하지 않는다. 진정한 지속은 반복 가능성을 전제로 한다. 어떤 실천이 의미 있으려면, 한 번 하고 끝나는 일이 아니라, 다시 만들 수 있는 일이어야 한다. 처음 만든 사람이 물러나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이어받아 자신만의 방식으로 계속해나갈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내가 없으면 아무도 안 하니까 내가 한다는 태도는 위험하다. 시작은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개인의 열정이나 헌신에만 의존하는 구조는, 그 사람이 빠지는 순간 곧바로 멈추고 만다. 지속 가능성은 사람이 아니라 구조로 움직이는 체계에서 나온다. 이와 연결해 생존이라는 개념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막연히 버티면 생존인가? 생물학적으로 보자면, 진짜 생존은 번식에 성공하는 일. 즉, 다음 세대로 이어주는 일이다. 영화제도 마찬가지다. 특정한 한 사람이 없어도 후배들이 운영을 이어갈 수 있어야 한다. 전환, 인수인계, 협업이 가능한 구조가 아니면, 어딘가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재생산이 불가능하다면, 영화제라기보다는 닫힌 모임 혹은 사적인 친목회에 가깝다. 기획자들끼리 즐거운 게 목적이라면, 굳이 영화제를 할 필요는 없다. 시네클럽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영화제를 한다는 건 다르다. 타인을 불러들이고, 반응을 감당하며, 즐거움을 나누는 열린 구조를 설계하는 일이다. 시네클럽과 영화제의 차이는 바로 열림에 있다. 시네클럽은 아는 사람들끼리 즐기는 구조지만, 영화제는 모르는 사람과 연결되기 위한 시도다.
열림과 연결이 가능하려면, 특정 개인이 없어도 돌아가는 시스템이어야 한다. 누구나 들어와 참여하고, 이어갈 수 있는 구조여야 한다. 결국, 당신이 시스템의 상수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지속 가능한 영화제는 사람 위에 세우는 게 아니라, 구조 위에 세워져야 한다.
네 번째 질문. 본인이 느끼기에 좋은 영화를 틀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초저예산 영화제에서 프로그래밍은 흔히 말하는 감식안의 문제가 아니다. 감식안 중심의 선정은 결국 비슷한 기준으로 고른, 비슷한 영화들로 수렴된다. 그리고 결과는 대체로 예측 가능하다. 하지만 예측 가능성 자체가, 초저예산 영화제가 가장 경계해야 할 지점이다. 자원이 부족한 영화제일수록 차별화의 방식, 선택 기준의 구조부터 달라야 한다. 이미 다른 영화제에서 상영된 작품을 다시 상영하는 일은 단순히 예산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상영료를 감당할 수 없다는 현실적인 한계는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감식안 중심의 선택이 결국 타 영화제의 판단을 반복하는 데 그친다는 점이다. 그렇게 되면 영화제의 독립성과 정체성은 약화되고, 관객에게도 굳이 당신의 영화제를 선택해야 할 이유를 설득력 있게 전달하지 못한다. 관객의 시간을 요청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고유성과 당위가 필요하다.
따라서 초저예산 영화제는 오히려 과감하게, 다른 영화제에선 보기 어려운 작품들을 소개해야 한다. 물론 선택지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제한된 조건 속에서 독자적인 매력을 구축할 수 있다면, 영화제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초저예산이라는 제약은 가장 강력한 정체성이자 명분이 된다. 상영료를 줄 수 없다는 조건은 대형 영화제를 피한 소극적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볼 수 없는 영화를 다루기 위한 적극적 근거가 될 수 있다. 결국 초저예산 영화제의 프로그래머는 감식하는 사람이 아니라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이다. 어떤 작품을 고르고, 어떤 맥락을 구성하며, 어떤 시야를 제시하는가. 미학적 우열이 아니라, 제한된 조건 속에서 어떤 의미를 설계하는가이다. 그래서 감식안은 오히려 내려놓아야 한다. 감식안은 종종 기존 영화제의 기준을 그대로 복제하는 도구가 되며, 결국 자본이 투입된 때깔 좋은 영화를 다시 골라내는 데 그칠 수 있다.
실제로 단편 영화들 중 관객의 눈에 먼저 띄는 작품들은 비슷한 조건을 갖는다. 제작비가 상대적으로 높거나, 숙련된 스태프가 참여했거나, 연기 경험이 풍부한 배우가 출연한 영화들. 더 많은 자원과 노하우가 투입된 결과, 당연히 더 완성도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눈에 먼저 띄는 영화들일수록 이미 여러 영화제에서 상영되었거나, 앞으로 상영될 가능성이 높다. 초저예산 영화제가 눈에 먼저 띄는 영화들을 다시 상영한다면, 결과적으로 기존 영화제의 하위 복제, 후순위 기획이 될 수밖에 없다. 복제품이 되는 길을 피하기 위해서는, 선정 단계에서 감식안을 무력화할 수 있는 구조적 제약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제작지원을 받지 않은 영화. 영화학교 밖에서 제작된 영화. 스태프 수가 10명을 넘지 않는 영화. 독특한 기준은 산업 시스템 밖에서 만들어진, 작고 약한 영화를 의도적으로 끌어올리는 전략이 될 수 있다. 크레디트를 기준으로 한 1차 필터링도 유효하다. 크레디트는 영화의 제작 환경과 자본력, 규모를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지표다. 모든 기준은 하나의 목적을 향한다. 때깔 좋은 영화의 유혹에서 스스로 방어하는 일. 한 번 유혹에 흔들리기 시작하면, 초저예산 영화제는 대형 영화제와의 비교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영화제를 만든 본래의 목적 역시 흐려진다.
결국 작품을 고르는 방식 자체가 달라져야 한다. 방식이 달라지면 기준이 달라지고, 기준이 달라져야 결과가 달라진다. 그래야 영화제의 정체성도 분명해질 수 있다. 방식은 얼마든지 유연하고 실험적일 수 있다. 예컨대 일정 기준을 통과한 영화들 중 무작위로 추첨하거나, 기획자 각자에게 쿼터를 부여해 자유롭게 선정하게 하는 방법도 있다. 완벽한 합의나 감식 기준보다는, 다채롭고 분산된 시선을 제도화하는 방식이 초저예산 구조에 더 잘 맞는다. 혹은 보다 전략적으로, 적을 설정하는 방식도 있다. 예를 들어 FILM IN DAEDEOK은 부산국제영화제와 일부러 시기를 겹치게 잡는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없는 영화를 다루는 플랫폼으로 스스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전략이다. 부산 · 전주 · 부천 등 주요 영화제에 상영된 작품 또는 상영 가능성이 높은 작품을 사전 배제하는 방식도 유효한 기준이 될 수 있다. 영화제가 지향 바, 거부 바를 분명히 드러나게 한다. 결국 초저예산 영화제의 힘은 자원의 크기가 아니라, 기준의 명확성, 방향의 일관성, 선택의 용기에서 비롯된다.
다섯 번째 질문. 작년보다 후진 영화제를 할 자신이 있는가?
초저예산 영화제에서 예산은 결코 안정적일 수 없다. 지원사업의 당락, 기획자의 경제 사정, 지역사회와의 관계, 해마다 바뀌는 프로그램 방향 등 매년 변수는 너무 많다. 그래서 예산은 유지해야 할 고정값이 아니라, 매번 새롭게 조정해야 할 유동값이다. 불확실한 구조 속에서 하나 추천할 만한 방식이 있다면, 바로 십일조다. 자신의 수익 중 1/10 정도를 영화제에 꾸준히 투자하는 방식이다. 규모가 작고 지속이 불확실한 영화제일수록, 지속성 자체를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 외부 자금을 확보하지 못하더라도, 감당 가능한 선에서 자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
문제는 예산 자체보다 조직이 갖는 관성이다. 대부분의 조직은 크기와 상관없이 해마다 나아져야 한다는 전제를 따른다. 더 커지고, 더 좋아져야 하며, 작년보다 빈약해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이 무의식적으로 작동한다. 그대로 머물면 퇴보처럼 느껴지고, 축소는 실패처럼 받아들여진다. 대표적인 사례가 공간이다. FILM IN DAEDEOK의 1~2회는 대덕구청 지하 커뮤니티 공간인 청년벙커에서 열렸다. 전문 상영 장비도 부족했고, 공간도 좁았다. 그러다 3회부터 극장에서 상영을 시작했고, 이후 다시 커뮤니티 공간으로 돌아가는 건 사실상 어려워졌다. 일종의 돌이킬 수 없는 임계점을 넘은 셈이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한 번 초청 감독에게 게스트비를 지급하면 다음 해에도 기준을 유지해야하는 부담이 생긴다. 늘어난 상영일정도 다시 줄이긴 어렵다.
외부 평가보다 더 강력한 건 내부의 심리적 저항이다. 우리는 계속 성장해야 한다는 믿음은 자주, 그러나 불필요하게 조직을 압박하는 족쇄가 된다. 필요한 해법은 두 가지다. 첫째, 예산에 맞춰 과감히 축소하기. 공간, 일정, 규모, 게스트. 무엇이든 필요하다면 줄여야 한다. 예산이 줄었으면, 프로그램도 줄여야 한다. 퇴보가 아니라 조정이며, 기획 역량의 또 다른 방식이다. 둘째, 늘어난 관성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새로운 예산을 확보하기. 외부 후원을 확대하거나, 기획의 범위를 넓혀 공공 지원을 유치하거나, 내부적으로 십시일반 자원을 모으는 방법이 있다. FILM IN DAEDEOK이 지금까지 해온 방식이다. 매년 질적 · 양적 상승을 목표로 해온 결과다.
그러나 어떤 방식이든 늘려야 한다는 명제는 전제가 아니라 선택이어야 한다. 필요하다면 축소를, 경우에 따라 1년의 휴식을 선택할 수도 있다. 작품 수급이 어려울 수도 있고, 팀원들의 일정이나 체력이 맞지 않을 수도 있다. 외적인 변수는 매년 존재한다. 중요한 건 작년보다 나아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는 일이다. 축소는 회복일 수 있고, 휴식은 또 다른 기획일 수 있다. 결정을 조직 내부에서 유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영화제도 건강하게 오래갈 수 있다. 필요할 땐 가볍게 할 수 있어야 하고, 지쳤을 땐 웃으며 줄일 수 있어야 한다. 작아졌다고 초라해졌다고 느끼지 않아야 한다. 지속 가능성이란 잘 버티는 힘이 아니라, 잘 줄이는 용기다.
여섯 번째 질문. 직업이 있는가?
초저예산 영화제를 시작하려는 사람에게 내가 가장 먼저 던지는 질문은 하나다. 지금 본인에게 수익이 발생하는 확실한 직업이 있는가? 만약 없다면, 정중히 말리고 싶다. 초저예산 영화제는 절대 수익 모델이 될 수 없다. 영화제로 생계를 유지한다는 건, 말 그대로 꿈 같은 이야기다. 듣기엔 멋져 보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 꿈에서 너무 늦게 깨어나는 편보다, 애초에 빨리 깨어나는 편이 낫다.
만약 큰 규모의 영화제가 목표라면, 방향을 바꿔야 한다. 기존 대형 영화제를 지향하고, 비즈니스 관점에서 접근하거나 기성 영화제에서 커리어를 시작하는 편이 훨씬 현실적이다. 하지만 초저예산 영화제는 다르다. 좋은 만큼만 하고,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지출해야 지속될 수 있다. 균형이 무너지면, 영화제는 금세 부담이 되고 만다. 소진되고, 자괴감에 빠지며, 결국 회의감 속에 무너진다.
가장 조심해야 할 순간은, 영화제가 노동(Labour)이 되는 순간이다. 영화제가 생계를 위한 일이 되는 순간, 더 이상 실천(Action)이 아니다. 애인과 같은 영화를 생계의 도구로 삼는 순간, 사랑은 식는다. 영화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영화로 돈 벌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 영화를 애인처럼 여긴다면, 애인으로 남겨야 한다. 그래서 결국, 진짜 중요한 질문은 의식주를 책임질 수 있는 본업이 따로 있는가? 다.
초저예산 영화제는 어디까지나 삶의 바깥에서 하는 일이어야 한다. 여유가 허락할 때, 균형 안에서 실천할 수 있는 일. 그래야 자신도, 영화제도 함께 무너지지 않는다. 초저예산 영화제를 지속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먼저 자신의 삶을 책임지기. 인생의 구조를 설계한 뒤, 영화제를 곁에 두기. 영화제를 삶의 도구가 아닌, 삶을 더 풍요롭게 해주는 짧은 이벤트로 삼기.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영화제는 오래갈 수 있고, 당신도 지치지 않고 오래 남아 있을 수 있다.
일곱 번째 질문. 지원사업을 받지 않고도 초저예산 영화제를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특히 영화제의 연차가 쌓일수록 더 그렇다. 처음에는 분명한 의미와 동기로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 수단과 목적이 뒤바뀌는 시점이 찾아온다. 영화제를 하기 위해 지원금을 받지를 않고, 지원금을 받기 위해 영화제를 하게 된다. 왜 하는가? 라는 본질적인 질문은 사라지고, 어떻게 할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만이 남는다.
한 번 꼬이기 시작하면, 팀은 빠르게 소진된다. 사람은 남아 있어도, 즐거움은 사라진다. 처음의 의욕과 기대, 기획의 즐거움은 점점 희미해지고, 영화제는 버티는 일, 계산하는 일, 피로한 일이 되어버린다. 함정을 피하려면, 내부적으로 최소한의 규칙과 약속을 미리 정해두어야 한다. 예를 들어, 4년에 한 번은 반드시 지원 없이 영화제를 치른다는 규약 말이다. 일종의 생존 실험, 자발적인 훈련이자 감각을 되돌리는 리셋 버튼이다.
예산의 힘은 결코 가볍지 않다. 돈은 사람을 빠르게 길들인다. 편리함에 익숙해지면, 불편했던 시절로는 돌아가기 어렵다. 처음엔 없는 돈으로도 즐겁게 해내던 팀이, 어느새 없으면 못 하는 팀이 되어버리는 건 순식간이다. 그마저도 어렵다면, 지원금을 받는 프로젝트와 받지 않는 프로젝트를 분리해 운영해야 한다. 돈이 필요한 일과, 의미가 중요한 일을 하나의 바구니에 담아서는 안 된다. 결국, 둘 다 망가질 수 있다.
여덟 번째 질문. 작전세력처럼 움직일 자신이 있는가?
영화제에는 저점매수 전략이 필요하다. 작품에 대한 저점매수, 감독에 대한 저점매수. 영화제는 좋은 영화를 소개하는 곳이 아니다. 오히려 좋음이 시장에서 증명되기 전에, 가치를 먼저 믿고 시장보다 앞서 밀어주는 공간이다. 영화는 본질적으로 이미지와 사운드의 나열이다. 좋은 영화라는 평가는 역사와 제도가 의미를 부여한 사회적 결과일 뿐이다. 즉, 영화의 가치는 사회적이다. 의도적으로 공략해야 한다.
어떤 영화를 좋다고 계속 주장하면, 어느 순간 실제로 좋은 영화가 된다. (물론, 기획자 당사자들은 진짜로 좋다고 느낀 영화여야 한다.) 반복된 언급과 추천, 상영과 담론 속에서 작품은 점차 의미를 획득해 간다. 그러니 다양한 영화를 소개하려 애쓰지 마라. 깊게 밀어야 한다. 넓게 퍼뜨리려 하지 말고, 좁고 깊게 밀어붙여야 한다. 첫 번째 영화제에서 소개한 감독의 다음 작품, 두 번째 영화제에서 다뤘던 감독의 또 다른 영화. 성공할 때까지, 계속 밀고, 또 밀어야 한다.
마치 주식과도 같다. 주식의 가격은 결국 기업의 가치에 수렴하지만, 영화는 다르다. 의미를 부여하는 누군가가 마치 작전세력처럼 존재할 수 있다. 가치를 설정하면, 사람들은 발견하기 시작한다. 작은 영화제든, 큰 영화제든 모두가 영화에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를 만들어내는 권위의 당사자다.
차이는 규모일 뿐, 작다고 해서 무력하지는 않다. 작은 영화제는 작은 권위를 가진다. 그래서 더 의도적으로, 더 반복적으로 밀어야 한다. 반복은 권위를 만들고, 반복은 구별을 만든다. 이 영화제는 이 감독을 초기에 주목했다는 기억, 이 영화제는 이 작품을 끝까지 지지했다는 신뢰. 초저예산 영화제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프로그래밍 자산이다.
아홉 번째 질문. 영화가 좋아서 초저예산 영화제를 하는가?
영화를 좋아하는 일, 영화를 만드는 일, 영화에 대해 글을 쓰는 일. 이 셋은 결코 같은 층위가 아니다. 그리고 영화제를 운영하는 일은, 이 셋과는 또 다른 층위에 속한다. 영화를 좋아한다고 해서, 영화제를 잘 운영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잘하는 일, 잘하고 싶은 일, 하고 싶은 일은 다르다. 초저예산 영화제를 운영하다 보면, 이 셋은 때때로 충돌하거나 무시된다. 예술적 감식안보다 복합적인 실행 능력이 중요하다.
겉보기엔 영화 제작과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의지, 끈기, 반복, 조직, 협상, 통제와 같은 덕목. 군인이나 영업사원에 가까운 역량이 요구된다. 그래서 영화를 좋아해서 영화제를 시작했다면, 현실의 벽과 마주하는 순간, 오히려 영화와의 관계가 멀어질 수도 있다.
프로그래밍의 즐거움은 짧다. 이후엔 지루하고 반복적인 업무가 줄줄이 기다린다. 결과보고서, 기획서, 상영 및 음향 조율, 스태프 운영, 게스트 초청, 홍보, 인쇄물 제작, 연락 업무, 행정 처리, 재무 정산까지. 아무리 작은 영화제라도 2:8의 법칙은 그대로 적용된다. 즐거운 순간은 20%, 지루하고 고단한 시간이 80%다. 물론 시간이 지나며 능숙해지는 일도 있고, 뜻밖의 즐거움을 느끼게 되는 일도 있다.
하지만 모든 현실 앞에서, 반드시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 내가 잘하는 일이 하나라도 있는가? 그리고 지루한 시간들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가? 적어도, 영화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영화제를 시작하진 말자. 최고의 시네필은 누구 하나 이름도 모르는 채, 사라진 시네필이다. 일이 될 필요는 없다.
열 번째 질문. 어떤 실패까지 감당할 수 있는가?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고,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 나름대로 불행하다.”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다. 영화제도 마찬가지다. 행복한 영화제는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영화제는 각기 다른 이유로 실패한다. 관객이 오지 않는 실패, 팀이 해체되는 실패, 상영 도중 기술 사고가 나는 실패, 지원사업에 떨어지는 실패, 외부의 비판을 받는 실패, 그리고 처음 품었던 의미가 점점 퇴색되는 실패까지. 무엇보다 초저예산 영화제에서 가장 흔한 실패는 관객의 부재다. 좋은 기획, 훌륭한 상영작, 열정적인 준비에도 불구하고 좌석은 텅 비고, 공간에는 반응이 없다. 누군가 와서 비판이라도 해준다면 차라리 나을지 모른다. 침묵은 존재 자체가 부정당한 듯한 느낌을 들게 한다.
내가 만든 행사, 꾸민 공간, 붙인 포스터가 아무 일도 일으키지 않는다는 사실. 가장 고통스럽다. 그래서 정말 중요한 건 실패 자체가 아니다. 내가 어디까지의 실패를 감당할 수 있는가다. 미리 상상해보자. 어디까지의 실패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 한계를 감정적으로 가늠해보자. 실패가 닥치면 감정이 앞서기 마련이다. 그때는 냉정하게 판단하기 어렵다. 실패의 예상치, 그리고 감정의 내진설계는 사전에 준비돼 있어야 한다. 실패는 리스크가 아니라, 영화제 운영에 내포된 하나의 조건이다. 실패는 때로 방향을 바꾸라는 신호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실패를 내가 틀렸다는 증거로 받아들인다. (나 또한 그렇다.) 구조나 조건의 문제는 곧장 개인의 결함으로 환원되고, 실패는 인격에 대한 심판처럼 작용한다. 그렇게 한 번의 실패는 전체 프로젝트를 무너뜨리는 자괴감으로 이어진다. 위험하다. 실패를 경험이 아닌 낙인으로 받아들이면, 다시 시도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영화제를 계속하려면, 실패를 견디는 힘이 필요하다. 실패를 감정이 아닌 태도로 바라보는 감각. 실패해도 괜찮다. 다시 하면 된다. 스스로에게 가볍게 건넬 수 있어야 한다.
실패를 무겁게 다루면, 다시는 일어설 수 없다. 초저예산 영화제의 기획자는 영화감독과 닮았다. 작품이 실패하면 모든 책임이 감독에게 돌아간다. 제작, 스태프, 배우, 배급 등 다양한 원인이 있더라도 모든 맥락은 쉽게 지워진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다. 실패해도 나로 남을 수 있다면, 그리고 여전히 에너지가 남아 있다면, 계속 반복하면 된다. 데뷔작이 본인의 최고작인 감독은 드물다. 과거의 감독들이 영화를 잘 만들었던 이유는 많이 찍어서다. 당신도 마찬가지다. 많이 하면, 결국 조금씩 더 나아질 수밖에 없다.
열한 번째 질문. 언제 영화제를 끝낼 것인가?
모든 시작에는 끝이 있다. 어떤 기획도 영원할 수 없다. 지속은 기본값이 아니라, 매 순간 새롭게 선택되는 결과다. 하지만 우리는 끝을 좀처럼 계획하지 않는다. 잘 끝내겠다는 말은 종종 그만두고 싶다는 신호로 오해받고, 언제부터인가 계속해야만 한다고 여겨진다. 우리는 멈추는 연습을 배우지 못한 채, 달리기만 한다. 그래서 많은 영화제는 끝을 맞이하지 못한다. 몰락하듯 사라진다. 내부의 갈등, 운영자의 탈진, 예산의 단절, 관객의 이탈. 준비되지 않은 끝은 늘 외부의 탓처럼 보이지만, 대부분은 오래 미뤄온 결정의 결과일 뿐이다.
지속을 당연시할 때, 영화제는 결국 스스로 갉아먹는다. 멈추지 못하는 구조는 반드시 어디선가 무너진다. 초저예산 영화제는 특히 그렇다. 대체 가능한 자원이 거의 없는 구조에서 사람에 의존하는 운영은 곧 사람의 고갈로 이어진다. 운영자의 열정이 한계에 다다르면, 영화제도 함께 멈춘다. 그러니 오히려 중요한 점은 언제, 어떻게 영화제를 끝낼 지 미리 고민하는 일이다. 지속을 위한 설계는 끝을 포함해야 완성된다. 시작의 명분을 고민하듯, 끝의 기준도 분명히 정해져 있어야 한다. 왜 계속해야 하는지를 묻는 만큼, 언제 멈춰야 하는지도 물어야 한다.
영화제가 나를 잠식하기 시작할 때, 더 이상 즐겁지 않을 때, 관객과의 관계가 소진되었을 때. 혹은 일을 더 잘 해낼 누군가에게 자연스럽게 바통을 넘길 수 있을 때. 그 시점이 바로, 끝을 선택할 수 있는 순간이다. 끝은 패배가 아니다. 완결이며, 다음을 위한 준비다. 끝나야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다. 어떤 기획이든 제 역할을 다했다면, 퇴장은 가장 책임 있는 선택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끝을 두려워하지만, 정작 두려워해야 하는 상태에 끝내지 못하고 머무는 상태다. 멈출 수 없는 기획은 더 이상 자유롭지 않다. 끝낼 수 있다는 자유가 중요하다. 영화제가 나를 지배하면 곤란하다. 내가 영화제를 운영해야 한다. 영화제가 내 삶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라는 감각. 원할 때 멈출 수 있고, 멈춘다고 해서 내가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또 다른 한편으론, 의도적으로 끝을 맞이하는 전략도 필요하다. 관성과 무기력에서 깨어나 새로운 동력을 얻기 위해, 한 사람에게 모든 책임이 집중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실패한 부분을 정리하고 자원을 재배치하기 위해, 혹은 실험적이고 짧은 생애 주기를 가진 영화제를 시도하기 위해. 무변화의 안정이 때론 가장 위험할 수 있다는 인식을 갖기 위해. 끝은 두렵거나 슬픈 일이 아니다. 가장 성숙한 형태의 자유다.
마치며 : 그럼에도 할 건가요?
지금까지 질문과 답변을 읽고, 아마도 초저예산 영화제를 준비하는 사람은 나는 부합한 사람일까? 과연 할 수 있을까? 고민한 후, 고개를 떨구게 될지도 모른다. 수익도 없고, 함께할 동료도 없고, 특별히 잘하는 일도 없고, 모든 고단함을 감당할 자신도 없을 수 있다. 그래서 돌아서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괜찮다. 충분히 존중받아야 할 결정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좆까 난 해볼 거야” 그렇게 느껴졌다면, 지금 당장 해라. 망설이지 말고, 계산하지 말고, 머뭇거리지 말고. 결국, 버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이 한다. 시작은 조건이 아니라 감정이 시킨다.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면, 이미 당신은 시작할 준비가 된 사람이다. 망해도 괜찮다. 실패해도 된다. 나중 문제다. 지금 중요한 건, 지금 마음이다. 마음이 생겼다면, 언젠가는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언젠가 만나길 고대한다. 지옥에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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