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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불문! 대구독립영화

<건강한 시네필 문화라는 농담> - 2024관객프로그래머 영화제 <조발기> 시네토크 / 2024.11.16

 

 

건강한 시네필 문화라는 농담

 

배은열

 

 

지난 해 1115-17일 대구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에서 관객프로그래머 영화제 퍼스널 스페이스가 열렸다. 나는 15일에 상영된 영화 <조발기>의 시네토크에 참석했다. 이 글은 해당 시네토크 자리에서 진행한 이야기의 요약본이지만 <조발기>에 한정되는 내용은 아니다.

 

최근 건강한 시네필 문화라는 표현이 자주 쓰인다. 이번에 진행한 시네토크는 이 표현에 대한 강한 반감에서 비롯한다. 결론부터 시작하고 싶다. 영화 <조발기>에서 상훈이 겪는 강박증. 시네토크 주제인 탐욕적 사랑으로서 시네필. 시네필은 이 두 가지가 결합한 존재다. 시네필은 탐욕적인 강박증 환자. 이 글은 시네필과 강박증 환자와 탐욕이란 서로 다른 세 가지 키워드가 얼마나 닮아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덧붙여 시네필 문화의 종말까지 말해보고 싶다.

 

영화비평가 세르주 다네는 시네필은 강박증 환자와 닮아있다고 말한다. 예리한 통찰이다. 둘은 닮아있다. 시네필과 강박증 환자의 핵심은 자신이 만들어 낸 복잡하고 체계적인 원칙에 얽매여 살아간다는 점이다. 비유하자면 (기독교적 의미에서) 종교적 에너지가 있다. 믿음이 작동한다. 시네필 문화가 가진 가톨릭적 측면은 영화사에서 여러 차례 검토된 적이 있다. 시네필 문화는 세계 최대 가톨릭 국가 중 하나인 프랑스에서 출발했다. 영화 <조발기>에서 상훈도 본인의 기독교 신앙에 대해 언급한다. 경쟁작 상영이 특정한 시간과 특정한 공간에서 반복되는 칸 영화제도 마찬가지다. 강박행동이 예식적(Ritual) 행동으로 발전된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믿음이란 주제에 집중하고 싶다. 시네필-강박증이 공유하는 에너지는 이신칭의(以信稱義)’적이다. ‘오직 믿음(sola fide)’이라 요약할 수 있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은밀하다. 믿음의 대상과 당사자만이 알 수 있다. 종교와 시네필-강박증은 자신이 만들어 낸 복잡하고 체계적인 원칙자신이 맺고 있는 복잡하고 체계적인 원칙이란 차이가 있을 뿐이다.

 

시네필-강박증이 공유하는 특징이 하나 더 있다. 스스로 지나친 불안 상태에 놓여있다는 것. 자신의 행동 및 생각이 불합리하다는 것. 두 가지 다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 밈이 있다. ‘자의식 있는 시네필들의 특징은 자의식 있는 시네필을 싫어한다는 표현이다. 당연하다. 자기혐오다. 스스로 불합리함에 대해 스스로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강박행동은 멈추지 않는다. 못한다. 시네필-강박증은 이와 같은 다양한 모순과 중첩 가운데 놓여있다. 세르주 다네는 시네필리아의 핵심이 주이상스(Jouissance)의 지체에서 비롯한다고 말한다. 주체의 쾌락 규제에서 벗어나서 향락에 닿고자 한다. 동시에 향락에 결코 닿지 않으려 한다. 영화 <조발기>제목이 재밌게 읽히는 까닭이다. <조발기>가 아닌 <, 발기>로 읽힌다. 조에서 이 사라진 상태다. 이 빠졌기에 영원히 향락에 닿지는 못한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머무는 것이다.

 

모순은 이것만이 아니다. 다네가 말하듯 시네필은 사회로부터는 끔찍한 것만이 기대가 되기에 도피하지만 영화에서 마주하고 바라는 것은 동시대적이고 현실적인 것이다. 마치 부모님이 걱정이 되어 집에 계속 전화하는 행동이 불합리한 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세운 원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강박 증상과 같다. 모순적이다.

 

강박증은 또한 탐욕적이다. 강박증(Obssesion, Obssesive-Compulsive Disorder)에서 Obssesion의 라틴어 어원엔 포위, 봉쇄, 박힘이란 뜻이 있다. 공간 점유다. 집착하는 욕심이 깔려있다. ‘강박증안에 탐욕이 자리하고 있다. 탐욕은 7대 죄악 중 하나다. 성경에서 탐욕은 일상에서 사용하는 탐욕과 느낌이 다르다. 인색하다는 표현에 가깝다. 골 욕심에 넘치는 공격수보단 구두쇠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나의 시네필리의 핵심이다.”라는 다네의 표현과 같다. ‘도피가 아니다. ‘이 세계에서 사는 것이다. 탐욕이란 단어가 가진 이미지는 포위하고 봉쇄하고 박힌 채로 있는 상태에 가깝다. 탐욕과 강박과 시네필의 핵심이 닮았다. ‘나만(의 원칙)’의 공간에서 머무는 것이다.

 

시네필-강박증-탐욕은 치유될 수 있을까? (약물 치료가 제외된) 강박증 치료에 가장 효과적인 것은 유산소 운동, 몸의 움직임, 노출 치료라고 한다. 이 세 가지 다 시네필의 성격과 정반대다. 영화 감상에서 배제되는 요소들이다. 영화는 이미지와 운동의 결합이다. 그러나 정작 감상하는 사람은 움직이지 않는다. 게다가 캄캄한 어둠 속에 숨는다. 스크린 속 인물은 노출된다. 보는 사람은 노출되지 않는다. 불공평한 관계가 성립한다. 영화가 가진 본질적 모순이다. 다르게 말하면, 영화관이란 상황은 시네필이란 강박증이 치료될 수 없는 환경이다. 병은 깊어지고 치료될 여지가 없다. 치유되지 않고 증상이 계속 지체하는 공간이 영화관이다.

 

오늘날 시네필 문화에서 탐욕강박은 힘이 사라지고 있다. 영화 <조발기>가 가진 처절함과 잔인함과 같다. 영화 <조발기>가 의미 있는 영화라면 시네필리아의 종말이란 징후가 포착되기 때문이다. 여기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 가운데 현장 활동가로서 느끼는 바가 있다. 짧게 언급하겠다.

 

소설가 밀란 쿤데라는 조지 오웰 소설이 싫다고 말한다. 창이 없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창은 숨구멍, , 영혼이다. 이성적이나 과학적으로 밝혀낼 수 없는 틈이다. 애매모호하고 환상적인 공간이 없다. 쿤데라 표현에 따르면 카프카적 공간이 없다. 돈키호테에는 웃음이 없다. 오늘날 시네필 문화가 겪는 위험도 마찬가지다. 밝음과 어둠이 있다. 사이가 사라졌다. ‘흐릿함이 사라졌다. 최근 시네필 문화에서 증명하려는 태도가 강해졌다. 세르주 다네가 쓴 카포의 트레블링에서는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 <치카마츠 이야기>가 언급된다. 해당 쇼트가 패닝이었다 말한다. 실제로는 움직임 하나 없는 쇼트다. 이러한 나만의 착오가 용납되지 않는 시대다.

 

영화 <조발기>에서 상훈님이 말하는 남의 의견이 없으면 판단이 잘 안 된다는 대사와도 연결된다. 나의 원칙과 규칙이 사라진다. 나만의 불법점거가 사라진다. 시몬 베유가 쓴 신을 기다리며에서 말하듯 이미 전제된 그리스도의 상을 찾는다. 이제 영화 감상은 나의 것이 아니다. 증명의 영역. 확인의 영역이다. 권위가 있는 몇몇 평론가의 의견이 확인되는 기회다. 시몬 베유가 말하듯 신을 찾고 있던 자(유대인)가 예수를 못 박는다. 비극이다. 자신에게 전제되지 않은 그리스도는 폐기된다. 영화 <조커 2 : 폴리 아 되>와 같다. 징후적인 영화다. 영화 속 조커는 본인이 믿는 세계에서 머물기 포기한다. 조커가 죽는 이유는 치유되었기 때문이다. 더는 판타지에 있을 자격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영화 <조커 2 : 폴리 아 되>는 다른 의미에서도 흥미롭다. 공유정신병이 불가능한 시대가 그려진다. 오늘날 시네필은 탈역사적이며 파편화되어 있다. ‘영화를 좋아하는 것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다르다. 평론가 강덕구의 지적처럼 영화를 좋아하는 것영화의 역사를 좋아하는 것이다. ‘나만의 원리 원칙은 영화사의 수용 이후 벌어지는 반항 작업에서 발생한다. 지금의 영화사는 정당하지 않았다. 고로 다른 방식으로 점유하겠다는 발상이 시네필에겐 깔려있다. 수용 작업이 없이는 점유도 발생하지 않는다. 역사적 의식의 공유. 공유정신병이 시네필 커뮤니티가 작동하는 원리였다. 최근 시네필 문화에서 많은 분들이 우려하는 부분과 같다. 포드, 혹스, 히치콕, 카프라, 와일더, 와일러와 같은 이름이 잊히고 있다. 대신 속칭 트랜디한 감독들의 작품은 소비된다. 공통된 분모가 사라졌다.

 

망상이 사라지고 공유가 불가능해진 시대. 건강함과 치유가 넘쳐나는 시대. 강박과 탐욕의 시네필리아에겐 어떤 미래가 기다릴까. 암울한 전망이 예상된다. 평론가 유운성의 지적처럼 영화는 곧 재즈와 비슷하게 될 것이다. 구세대가 즐긴 미스터리한 무언가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현실이다. 영화는 곧 끝난다. 더는 <대부><기생충> 같은 매체적 · 예술적 양측에서 파괴적인 작품이 나올 수 없다. 파인다이닝(미겔 고미쉬)과 맥도날드(범죄도시). 두 가지로 나뉠 것이다. 반대로 평론가 김성욱의 지적처럼 지금 세대는 영화의 종말에 놓인 특권적 세대. 타이타닉에 남은 마지막 연주자와 같은 특권이다.

 

시네필이라면 이 죽음마저도 점유하려 한다. ‘시네필이라면 영화라는 타이타닉에 함께 남는 것이다.

 

부활이란 기적에 대해 말할 때가 아니다. 우리가 목격할 풍경은 장 르누아르의 <나나>와 알베르 세라의 <루이 14세의 죽음>와 가깝다. 죽음마저 점유하고 싶은 충동에 놓인 유일무이한 세대가 우리일 수 있다. 강박증 환자이자 탐욕적인 시네필이 치료되고 있는 종말의 풍경. 어떻게 이 죽음과 종말은 점유될 수 있을까. 고민은 각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