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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불문! 대구독립영화

대구 시네마테크 운동 밑그림 그리기: 이영은과의 대화 - 1

대구 시네마테크 운동 밑그림 그리기 : 이영은과의 대화

 

 

대구영화발굴단

(김주리, 금동현, 류승원, 이라진)

 

 

 

2024929일 오후 두 시 남구청년센터에서 대구영화발굴단은 이영은을 만났다. 96년 창립된 대구 시네마테크 아메닉을 마지막까지 이끌어 나갔던 이영은을, 우리는 지난 몇 년간 대구의 여러 극장들을 배회하며 때때로 마주치곤 했다. 우리는 이영은에게 지난 시간 겪어온 대구영화의 생태계와 관객문화의 변천에 대해, 그리고 아메닉의 시작과 끝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청했다. 이영은의 말들을 통해 떠올려본, 벅차게 생동하는 그 시절의 풍경은 지금으로부터 무척 멀지는 않았지만 또 그리 가깝지도 않았다.

 

그리고 11월의 어느 날, 우리는 오오극장에서 이영은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인터뷰 이후 사람들과 함께 영화를 보던 순간들을 떠올리게 되었다던 이영은은 조만간 작은 상영회를 열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날의 근황을 전하던 이영은의 밝은 얼굴은 우리들에게 설명할 수 없이 큰 기쁨으로 다가왔다. 우리에게 '영화 보기'란 무엇이며 영화를 보는 이들의 공동체란 어떠해야 하는 것일까. 두 차례에 걸친 이영은과의 대화는 우리로 하여금 울적하고도 즐거운 고민들을 남겼다.

 

지금까지 대구영화발굴단은 간단한 소개와 함께 구술 전문을 파일로 첨부하는 방식으로 채록의 결과물을 공개해왔다. 그렇지만 이러한 방식은 독자의 접근성이 떨어지거니와 그 배치가 우리의 구술이 소박한 사료로 비치게끔 만든 것 같다. 힘주어 다시 말하건대, 우리 대구영화발굴단은 소박한 기록이 아니라 오늘날 (대구/독립) 영화문화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기 위하여 구술을 진행해 오고 있다. 대구 또는 전국의 영화 애호가당연히 여기에는 감독을 비롯한 ()직업적 영화인도 포함된다.가 이 구술을 열띠게 읽어주기를 요청하는 배경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번 구술부터는 파일을 별도로 첨부하는 것이 아니라, 구술을 소절小節로 나누고 각 소절의 전문을 매거진 삼삼오오웹페이지에 4회에 걸쳐 업로드 하겠다.

 

 

1. 이영은의 90년대

 

김주리 (이하 김) : 안녕하세요. 저는 '대구영화발굴단'의 김주리라고 합니다. 최근 저희 '대구영화발굴단'에서는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사이에 비교적 활발히 활동하셨던 대구 관객들의 발자취를 살펴보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활동을 준비하면서 대구에 존재했던 여러 관객 모임, 단체 혹은 기관 등에 대한 기록들을 살펴보게 되었는데요.

 

그곳에서 이영은 선생님의 성함을 왕왕 발견하게 되었어요. 그러던 찰나에 마침 여기 계신 류승원 감독님께서도 몇 년 전에 오오극장 관객 모임에서 이영은 선생님을 몇 번 뵌 적이 있다고 말씀해주셨는데요. 그러면서 이영은 선생님께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의 어떤 대구의 영화 문화 혹은 관객 문화 그리고 또 시네필로서의 한 개인의 삶에 대해서 두루두루 이야기를 청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연락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흔쾌히 인터뷰 수락해 주셔서 다시 한 번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좀 이런저런 질문들을 드려볼 텐데요. 그냥 생각나시는 대로 편하게 답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선 선생님께서 원래 대구 분이신지가 좀 궁금했어요.

 

이영은 (이하 이) : 저는 대구에서 태어나서 아예 대구에서만 살고 있어요.

 

: 그럼 거주지 이동의 경험이 아예 없으신가요?

 

: . 구만 계속 바꾸고 있는 중이에요.

 

 

 

: 90년대 이전에는 영화를 보는 게 되게 좀 불량한 문화처럼 보이기도 했던 지점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90년대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서서히 엘리트적인 양식으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은 인상이 있어요. 지금도 또 그만의 다른 지위가 있는 것 같고요. 약간 그런 식으로 영화의 지위가 계속해서 변하고 있잖아요. 그래서인지 선생님께서는 영화를 어린 시절부터 좋아하셨던 건지 궁금했어요. 예전에는 좀 영화가 취급되는 방식이 지금이랑 달랐을 것 같아서요.

 

: 저도 일단 대구영화발굴단과 만나기로 하고 난 다음에 그 전의 인터뷰들을 보면서, 나는 어떤 질문을 받고 어떤 대답을 할까 그런 고민을 했는데요. 이렇게 자연스럽게 제가 시네마테크 아메닉이라는 공간에서 활동을 했기 때문에 결국 만나게 된 거잖아요. 그래서 거기에 내가 가기 전까지 어떻게 영화와 만났는가, 그냥 길 가다가 갑자기 그것에 대한 장면들이 정말 영화 필름처럼 떠오른 적이 여러 번 있었거든요.

 

생각을 해보니까 일단 대학교에 가가지고, 그때 문화 운동 이런 게 완전 폭발하던 시기였어요. 90년대 중반에 저도 이제 그런 것들이 새롭고 신기해서, 뭔가 이렇게 영화제라는 형식으로 뭔가를 하는 게 멋지고 좋아 보여 가지고 영화제를 가고 시네마테크를 가고 이랬던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그전까지는 당연하게 이렇게 평범한 그냥 대한민국의 80년대 청소년기를 보낸 90년대 대학생이 됐던 것 같아요.

 

그게 어떤 거냐 하면은 그때 같이 만나서 영화 보러 모인다고 그랬던 친구들 중에 대부분은 집에서 어릴 때는 MBC 주말의 명화KBS 토요명화일주일에 한 번씩 꼭 챙겨봤어요. 시간표 보면 이렇게 MBC 주말의 명화KBS 토요명화를 같은 시간에 밤 9<뉴스데스크> 끝나고 했거든요. 그리고 그 둘 중에서 어느 영화가 더 재밌을지 막 엄청 고민을 하는 거예요. 그중에 마음에 드는 영화를 보고 그리고 일요일에도 뭐 하는 영화 있으면 챙겨보고 그런 식으로 집에서 극장에서 영화를 봤어요. 저기 TV에서 해주는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던 영화가 너무 많으니까 그 영화를 이렇게 막 되새기고 친구들하고 좋았던 거 얘기하고 이런 식으로 청소년기를 보냈던 것 같고요.

 

그리고 고등학교 때 집집마다 비디오가 많이 공급됐거든요. 그래서 비디오 대여점이 많았어요. 그래가지고 그때 친구들하고 이제 주말에 모여가지고 그 당시에 극장에서 걸렸는데 못 봤던 영화를 친구 한 명이 보고 와서 ", 끝내준다" 이러면 주말에 다 같이 모여가지고 이렇게 같이 보고 그랬던 적이 있었던 것 같고.

 

그러니까 되게 평범하게 대중적으로 사람들이 좋아하고 잘 알려진 영화들을 보면서 '영화는 너무 좋다'라는 그런 마음을 이렇게 갖게 되는 그런 청소년기를 보냈고. 대학교에 갔을 때는 영화를 통해서 새로움을 주려고 하거나 가치를 만들려고 하는 그런 행사들이 되게 많았어요. 그런 영화제에 가가지고 새로운 영화들을 많이 보게 됐어요. 이렇게 누벨바그 영화나 그런 것들 그때 보고 이제 충격 받고 너무 놀라고 그리고 너무 멋있다고 생각하고그런 정도의 경로로 20대가 됐던 것 같아요.

 

: 그럼 선생님께서는 자기 자신이 영화광이다, 매니아다, 시네필이다 이렇게 그때 생각하지 않으셨던 건가요?

 

: . 왜냐하면 제가 살면서 그때 20대 중반에 정말 놀랐던 게 중학교, 고등학교 때부터 매 주말마다 극장에 가서 영화를 2편씩 3편씩 본 사람들이 시네마테크에 잔뜩 있더라고요. 영화를 진짜 많이 본 사람들이. 너무 신기하고 멋있고 좋은데, 약간 뭐라고 해야 되나 나도 모르게 사람이 그런 생각할 필요가 없는데 쫄았죠.

 

: 그럼 혹시 학번이 어떻게 되시는지 여쭈어도 될까요?

 

: 94학번이에요.

 

: 그러시군요. 대구 관객 모임에 관련된 정보를 또 찾다 보니까 이 시기에 말씀하셨던 것처럼 대학교의 영화 동아리들도 되게 활성화되어 있더라고요. '꿈틀'(경북대학교 영화동아리)이나 '햇살'(계명대학교 영화패) 같은 것들이 우선적으로 생각이 나는데요. 선생님께서는 '7예술'에서부터 영화 모임 활동을 시작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대학교 동아리를 거치지 않고 바로 그쪽으로 접근을 하시게 된 과정이 있으셨나요?

 

: 이게 지금 질문이 되게 좋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생각을 해보니까 우리가 이제 세상 전체를 큰 그림으로 보는 그런 능력은 타고나지 않잖아요. 특히 제가 대학생이 되면서 처음으로 사회라는 것에 어떤 조금씩의 경험을 하는데, 당연하게 제가 고등학교 대학교 다니면서 그전까지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을 통해가지고 알게 된 다른 동아리에 먼저 가입을 했어요.

 

근데 이제 그 동아리가 문화 전반에 대해서 되게 관심을 많이 가지고, 그런 거에 대해서 공부를 하거나, 또 이미 활동을 하는 선배들이 와서 저희한테 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게 많았던 때거든요. 이름을 말씀드리면 좋을 것 같은데 '문화 실험 집단 환장'이라는 동아리였는데요. 12기 이런 식으로 주제라든가 그다음에 활동 시기를 딱 정해놓고 사람들이 이렇게 이합집산 하는 그런 실험 활동을 한 적이 있는데요. 그걸 하는 선배들을 보고 저도 좀 좋아가지고 3기에 잠깐 활동을 했었어요.

 

그리고 90년대는 영화의 지위가 갑자기 바뀌고, 또 그다음에 이렇게 뭔가 세상이 달라지는 그런 흐름 같은 게 많이 느껴지는 그런 때였던 것 같아요. 정말로 90년대 중반은 그러면서 이렇게 새로운 변화를 만들고 싶거나 혹은 새로운 변화를 찾아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때였다고 생각이 드는데요. 제가 거기 모임에 있다 보니까 또 무슨 대학생 행사에 초대를 받았어요. 이제 거기에서 주제별로 여러 개의 행사를 하는데, 거기에서 이제 문화 분야에 영은 씨께서 한번 이렇게 중심이 돼가지고 이번 프로그램을 만들어보세요, 라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근데 이제 저는 제가 살아온 걸 보니까, 누가 뭐 하자 그러면 되게 좋아하고 무조건 하겠다고 좀 하는 성격이더라고요. 그래서 뭔가 재밌을 것 같다, 하고 싶다 해가지고 그거를 수락을 했어요.

 

그때 23일 동안 뭘 하면 좋을까 생각했는데, 그러면 대구 지역에 문화적인 활동이 뭐가 있나 이것저것 찾아보자라고 해가지고 이렇게 문화 공간들에 대해가지고 조사를 좀 했어요. 근데 그때 시네마테크가 '7예술'하고 '씨네하우스'가 있었고, 제가 '7예술'이랑 '씨네하우스'를 가서 이렇게 인터뷰를 하고 그거를 이제 자료집으로 만들었어요. 또 그다음에 클럽이 있었거든요. '클럽 헤비'라고. 그러니까 작은 인디밴드들이 공연하는 그런 락클럽이 있는데 그런 데 가가지고 또 인터뷰를 했어요. 그래서 그 23일 동안 사람들하고 그 공간을 같이 찾아다니고 그리고 거기에 대한 기록을 조그맣게 그냥 복사해가지고 남기는 그런 활동을 하는 걸 제가 했었어요.

 

그전까지는 저는 영화 동아리 '꿈틀'이나 '햇살'이 있는 줄은 몰랐던 거죠. 그때 조사하면서 영화 동아리도 있구나까지는 했어요. 저는 이제 대학생들의 활동이라는 거는 그냥 뭐가 있지 하고 관찰자의 입장인 것에 비해서 시네마테크를 하시는 이분들은 정말로 사회인으로 뭔가 변화를 만들고 있는 사람이라는 그런 인상을 받고, 너무 진짜 약간 좀 이게 오버스럽긴 하지만 진짜 감동을 받았거든요. 그래서 나도 거기에서 뭔가 보태고 싶다는 생각이나 아니면 그냥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에 그냥 자주 놀러 가고 찾아갔었거든요. 그러다가 그냥 자연스럽게 '7예술' 회원으로 이제 뭔가를 시작했다 이렇게 보면 될 것 같아요.

 

: 그러면 '7예술'이랑 '씨네하우스' 사이에는 어떤 좀 긴밀한 연결 관계가 있었던 건가요?

 

: 두 개가 합쳐져서 사람들이 친했어요.

 

금동현 (이하 금) : 그럼 '문화 실험 집단 환장'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학교에 있었어요?

 

: 경북대 안에 있었어요. 그러니까 동아리연합회라든가 그런 조직에 속하지 않고 그냥 이 문화 실험 자체를 가지고 스터디도 하고 책에 대한 공부도 하고 그다음에 어떤 작은 영화제 같은 걸 개최하거나 파티 같은 걸 개최하거나 하면서 새로운 문화 실험을 하려고 하는 그런 집단이었어요. 그러니까 인간관계로 맺어진 게 아니라 그 주제에 대한 참여 의식으로만 모였다는 그런 점에서 좀 색깔이 달랐던 것 같아요. 그냥 그 자체로 되게 저도 제가 밖에서 볼 때도 신기했고 들어가서도 뭔가를 하려고 할 때 훨씬 자유롭고 재밌고 신기하다는 느낌을 계속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근데 이제 계속 되지는 못하고 3기 이후에 그 활동을 했던 대부분 사람들이 대부분 다 대구를 떠났어요. 근데 이제 정말 불평은 아니고 그 당시에 제 느낌은 이렇게 그 사람들이 활동하기에는 대구가 너무 좁지 않았나라는 그런 인상을 가지고서 그 선배들을 모두 떠나보냈던 기억은 좀 있네요. 지금은 이런 말을 하고 싶지는 않은데 실제로 인력이 거의 서울로 유출되는 현상은 90년대 내내 있었던 것 같아요.

 

: 그러면 문화 실험이라 말씀하셨는데 뭔가 이들이 실험하려고 했던 게 있었던 것 같으세요?

 

: 그렇죠. 이게 제가 기억하기에는 95, 96년 아마 이 시기였을 거예요. 그 당시에 서울에도 락클럽들이 그때 막 생기고 '크라잉넛'이나 그런 밴드들이 그때 막 이렇게 활동을 시작했고 만들어지고 이런 굉장히 새로운 문화 주체들이 생기던 때였던 거예요. 거기에서 영화는 시네마테크라든가 그런 활동이 있고, 그리고 음악에서는 인디밴드가 나오고, 그리고 또 평론에 있어가지고 이렇게 약간 문화 학문이나 그런 어떤 장르에 머물지 않는 새로운 글쓰기 방식을 하거나 이런 사람들이 나오는데, 제가 지금 생각을 해보니까 이 '문화 실험 집단 환장'이라는 사람들은 일종의 평론가 집단으로 좀 보이긴 했어요.

 

그러면서 생산자로서의 역할도 해보자 그래가지고, 이를테면 인디 밴드 공연은 일반적으로 이렇게 밴드가 공연하고 관객이 보는 거라고 하면은, 우리는 함께 만들자 해가지고 뭔가 밴드 공연도 있지만은 같이 막 춤추고 놀고 이런 식의 이렇게 파티를 만드는 거를 실험적으로 해본 거죠.

 

그리고 불법이었던 일본 애니메이션 같은 거에 대한 관심이 되게 많았는데, 일본 애니메이션 아니면은 유럽이라든가 여러 나라에서 불온하다고 알려져 있으나 예술적으로 폭발력 있는, 그러니까 검열에서 걸리는 그런 영화들 있잖아요. 그런 영화들을 실제로 상영을 하고 그래가지고 영화제 중간에 중단되고 그랬던 것 같거든요.

 

근데 그런 게 뭐냐 하면, '왜 하지 말라고 하지? 그럼 한번 해보지, .', 그다음에 '왜 이런 게 없지? 사람들이 원하고 좋은 건데 그럼 한번 해보지, ' 이런 식의 실험을 하는 것 자체를 즐기고 그 실험을 통해서 그다음에 뭐가 나올 수 있을까에 대해서 말 그대로 자기 자신이 스스로 또 시험대에 올라가지고 관찰자인 동시에 체험자가 되는 그런 활동을 했던 것 같기는 해요.

 

근데 저는 얘기하면서 걱정이 되는 게 저도 이런 것들을 말로 하거나 그런 거를 할 수는 있지만은, 제가 몸담았던 그 모든 것에 제가 중심적인 역할을 한 적이 없고 저는 약간 좀 늘 관찰자일 수밖에 없고 그래서 이 내용에 대해서 제가 완전히 받아들이거나 혹은 제가 끌고 가거나 그런 능력을 키우지는 못하고 이렇게 조용히 옆에서 봤던 거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거라서 이게 진실에 얼마큼 가까운지는 잘 모르겠어요.

 

: 말씀하신 것처럼 뭔가 관찰자로서 오히려 더 잘 보이는 것도 저는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거는 신경 안 쓰셔도 괜찮을 것 같은데, 어쩌면 오히려 더 좋을 것 같아요. 근데 뭔가 듣다 보니까 이제 90년대 중반이면 학내 운동권이 조금은 과거에 비해서 열기가 많이 사그라들었을 때잖아요. 사실 92년 이후로는 한국 대학 내에 열기가 많이 사그라들었다는 기록은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요.

 

가령 조금 궁금한 게 어떤 새로움이나 뭔가 금지된 것이라고 했을 때, 이게 어떤 이념적인 차원에서 '우리를 금지하고 있는 거를 뛰어넘자' 이런 걸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금지를 하고 있으니까 '우리는 새로운 주체가 돼야 되니까 새로운 걸 하자'일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어떤 이념성이 있냐 없냐는 좀 중요한 문제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선생님한테 듣다 보니까는 좀 그 부분이 듣고 싶더라고요.

 

: 지금 하나도 안 중요한 거일 텐데 제가 전해들은 얘기가 뭐였냐면은 80년대 말, 89학번 90학번 이때부터 사회에서 보기엔 다 똑같은 운동권인데, 돌 던지고 데모하고 최루탄에 맞서 싸우던 그 사람들이 이렇게 운동의 방향성으로 좌파와 우파로 나뉘던 시기거든요. 근데 제가 느끼기에는 이때 이 새로운 실험을 영화를 통해서나 아니면 문화적인 어떤 행사를 통해서 하는 사람들은 좌파적인 이념성을 가지고 했던 사람이 많다고 생각이 들었고 저도 그렇게 보였어요. 그리고 그게 너무 매력적이었거든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 모든 게 그냥 다 좋고 긍정적이어서 거기서 내가 한 자리를 차지해야지가 아니라 모순이 있고 문제가 있는 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영원히 변치 않은 예술이잖아요. 그 모순에 있어가지고 우리가 세상에 대해서 혹은 사람에 대해서 혹은 영화든 음악이든 어떤 매체에 대해서 가지는 편견들은 분명히 존재하는데 그 편견을 정말로 이건 아니잖아 틀렸어라고 말하는 게 진짜 멋있어 보였고 분명히 그들의 활동은 실제로 대학교 운동권이 세상의 어떤 이렇게 변화의 돌을 던졌던 거에 대한 한 가지 활동이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되게 이념적 좌파들의 어떤 활동이었다라는 그런 인상으로 저는 남아 있어요.

 

: '문화 실험 집단 환장'에서 기수마다 어떤 주제가 정해져 있었다고 말씀해주셨는데, 가령 어떤 주제들이 있었을까요?

 

: 기억을 못하겠어요. 어떤 시대로 돌아왔을 때에 기억조차 나지 않거나 그런 시간들도 있고, 그리고 이제 제가 계속 거듭해서 하는 얘기 중에서 이게 약간 좀 지나치게 쪼그라든 말이긴 한데요. 제가 관찰자라는 얘기를 하는 게, 나도 열심히 뭘 했는데 나는 기억나는 게 없어요. 내가 주도했고 내가 내 가치를 가지고 내가 만들어냈다고 하면 사실 잊어버릴 수가 없는 일일 수 있는 것들일 텐데, 저는 그때 다른 사람들 쫓아가기에 좀 바쁘고 정신없고 내 마음속의 확실함이나 그런 건 좀 적었던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환장' 활동에서 뚜렷하게 내용이 기억나는 게 너무 없어요.

 

그리고 아메닉의 전 사무국장이었던 서영지 선배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공부를 시작하면서, 제가 활동을 돕던 차에 그 자리가 공석이 되면서 제가 이제 하겠다 해가지고 99년에 아메닉에 이렇게 사무국장 일을 했는데 근데 그건 이제 조금씩 기억은 나더라고요. 독립영화 상영회를 하고 그 상영회에서 정말 좋은 영화들을 관객들한테 잘 소개하고 싶었고 그런 것들은 기억이 나는데 구체적으로 무슨 영화를 몇 월 며칠 언제 상영했다 이런 것들에 대한 기억이 너무 흐릿한 거예요. 제가 자료를 가지고 있는 것도 하나도 없고. 그래서 좀 여러분한테도 죄송하고 그때 같이 했던 사람들한테 너무 죄송해요. 그러니까 다시 생각해 보면 그렇게 잃어버리면 안 되는 건데, 그렇게 잊어버리면 안 되는 건데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소중했거든요. 그리고 그때도 저도 되게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뭔가를 했던 것 같아요.

 

 

 

《 이영은과의 대화 2에서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