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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불문! 대구독립영화

대구 시네마테크 운동 밑그림 그리기: 이영은과의 대화 - 2

대구 시네마테크 운동 밑그림 그리기 : 이영은과의 대화

 

 

대구영화발굴단

(김주리, 금동현, 류승원, 이라진)

 

 

 

2. 이영은과 시네마테크 '아메닉'

 

: 이전에 인터뷰 요청을 드렸을 때, '7예술'을 통해 시네마테크를 처음 알게 되셨고 '7예술''씨네하우스'가 합쳐져 '아메닉'이 탄생하면서 '아메닉'에서 오랜 기간 활동을 하셨다고 말씀하셨던 것으로 기억이 나는데요. 그러면 이제 차근차근 앞에서부터 다시 이야기를 나눠보면 좋을 것 같아요. 앞서 말씀하신 대로 '7예술'은 그러면 지인 분을 통해서 알게 되신 건가요?

 

: 거꾸로 제가 그러니까 대학생들이 하는 행사에서 대구의 문화적인 공간들을 찾아보자 해가지고, '7예술''씨네하우스'라는 시네마테크가 있네 가보자 해가지고, 제가 똑똑똑하고 이방인이었는데 가서 말을 먼저 건 거예요. 그리고 대학생 애가 와가지고 시네마테크를 사람들한테 알리고 싶고 궁금해서 찾아왔다니까 '7예술'의 대표 김희경 언니하고 서영지 언니가 저를 너무 예뻐해 주셨거든요. 그리고 예쁨 받는 게 너무 좋아서 뭔가 이렇게 가가지고 소소하게 심부름이라도 할 수 있는 거 있으면 하려고 하고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그냥 '7예술'의 한 일원이 된 거죠. 그때 저는 너무 좋은 공간을 찾아가는 거를 되게 좋아하는 사람으로 살았더라고요.

 

근데 그때 취재를 찾아가서 그 사람들이 저를 받아들여주는 과정은 되게 행동이 멋스럽다고 생각이 드는 게, 영화를 너무 좋아하는 사람들이니까, 사람들이 모여서 만날 약속을 하면 무조건 무슨 극장 앞에서 무슨 영화 볼지를 정해서 영화 한 편 보고 밥 먹고 얘기하고 놀고 이렇게 영화를 좋아한다는 그 마음만으로 이렇게 찾아온 사람들을 너무 환대해 주는 느낌이 좀 있었어요. 제 눈에는 좀 대단한 사람들이었어요. 영화광이고, 영화에 대한 내용을 읽고, 영화제를 척척척 해내고 그런 게 그 당시에는 전례가 잘 없던 거였기 때문에 뭘 따라 하거나 정해진 대로 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이 전부 다 만들어내는 거였거든요. 그런 일들을 하는 사람들인데, 시네마테크를 찾아오는 사람에 대해서 너무 소박해서 좀 멋있고 좋다 이런 생각을 많이 했었던 것 같아요. 제가 찾아갔어요, 거기는.

 

: 그러면 '7예술'에서도 어떤 모임의 장소가 따로 마련이 되어 있었던 건가요?

 

: '열린공간Q'에 있었어요. '열린공간Q'에서 사무 공간을 쓸 수 있게 또 배려해 주셨어요. '열린공간Q' 자체가 저도 거기에 예전에 연극 공연도 보러갔었고 그리고 그 '7예술'이 하는 영화제도 저희가 보러 갔었어요. 바로 그 극장 한 켠에 '7예술'이 있는 것도 너무 재밌었고. 극장 집 밑에 있는 이렇게 영화 요정들이 사는 것 같은 그런 인상을 사실 받았거든요. 사무실 되게 조그맣거든요. 거기가 '열린공간Q'라는 공간도 크지 않은데 뭔가 이렇게 시내 극장에 영화 보러 가는 거랑은 정말 다른 느낌을 주는 공간이어서 잘 어울렸던 것 같아요. '7예술'이 거기 있었던 게.

 

: 그렇지 않아도 '열린공간Q'에 대한 다양한 기록들이 남아 있더라고요. 되게 실험적인 시도도 많이 했던 것 같고 해서 뭔가 그 당시에 대구에 있던 대학생들한테 나름대로 유명한 공간이었던 건지 궁금했어요. 대학생들이 거의 다 아는 장소였던건지.

 

: 그게 일단 뭔가 관심이 있으면 다 거기에 가보고 거기에서 영화들을 다 봤을 것 같아요. 거기서 꾸준히 영화제를 했으니까.

 

'씨네하우스'도 얘기하고 넘어가죠. '7예술'은 그런 식으로 '열린공간Q'에 있었는데 '씨네하우스'는 큰 정신과 병원 원장님께서 후원을 하셔가지고 아예 건물 지하였던 것 같은데 '씨네하우스' 상영 공간하고 같이 사무실을 운영을 해주셨어요.

 

근데 그분은 내용에는 관여를 안 하고 돈을 척척척 대주셨어요, 그 원장님은. 그리고 원승환 아시잖아요. 그죠? 그분처럼 진짜 실력 있고 이렇게 재능 뛰어난 영화광을 딱 섭외를 해가지고 알아서 운영해라 하고 딱 맡겨주셨기 때문에 상영회를 많이 했거든요. 제가 기억하는 건 그 이런 시네마테크가 두 군데나 있네라고 해서 찾아봤을 때 두 군데 다 활발하게 영상 상영 활동을 하고 있어가지고 좀 대단하다고 느꼈었어요. 근데 공간이 탄탄하게 두 군데 다 있었던 거죠. 사무실이 있고 그 사무실에 딸린 상영 공간에서 상영회를 정기적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 두 곳 다 위치나 아니면 건물의 형태 이런 것도 궁금하고 상영 시설도 어떤 느낌이었을지 궁금해요.

 

: 수성교 아세요? '열린공간Q'는 시내에서 수성교 탁 넘어가면 왼쪽 편에 있었어요. 수성교회 넘어가서, 수성교회에서 이제 넘어가면 도로 있고 바로 거기 이제 건물들 있잖아요. 저도 거기를 갈 때마다 너무 설레고 그랬어서 그런지 아직도 그 장면은 그대로 기억나거든요. 근데 제가 봤을 때는 '열린공간Q'가 좀 운영난이나 그런 게 조금 있었던 같은 게 1층에 재활용품 판매 이런 다른 사업을 같이 하는 공간이 있었고, 그다음에 2층에 상영 공간 이렇게 같이 있었어요.

 

'씨네하우스'는 이건 헷갈리긴 하는데 대명동 계대 아니면 시내에 약간 외곽쯤이었을 텐데요. 어쨌거나 제가 느끼기에는 조금 이렇게 깔끔하게 잘 정돈된, 적당한 크기의 공간이었던 걸로 기억나요. 지하였던 것 같고요.

 

 

: 그러면 '아메닉''씨네하우스'의 공간을 이어받은 건가요?

 

: 아니요. 우리는 시작할 때부터 공간을 임대를 했죠. 임대를 따로 해가지고 대명동에 다른 공간에서 시작했어요.

 

: 자료를 찾아보니 두 곳 다 대명동이라고 간략하게 표기되어 있어서 혹시 같은 장소인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 이게 사실 그때 이제 그 원장님하고 그 '씨네하우스'의 운영진들이 결별하는 과정이 있고 '열린공간Q'가 조금은 운영도 힘들고 좀 그러면서 사실은 '7예술'에 대해서 좀 든든하게 지원을 하지 못하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7예술''씨네하우스'에 핵심적으로 내용을 만들어 가던 젊은 친구들이 자발적으로 독립하면서 합친 거예요. 저는 '7예술'에서 같이 막 활동을 하는 게 아니라 영화를 볼 모임이 있으면 같이 가지만 내용을 만들거나 그런 일을 하는 상태가 아니어서 여전히 완벽한 관찰자가 목격자로서 그걸 봤는데 진짜 너무 멋있었어요. 자꾸 원장님이 간섭하면 때려치우라고 그러고 그다음에 우리 제대로 영화제 한 번 하고 우리 하고 싶은 거 실컷 해보자 이러고 으샤 으샤 으샤 이러고 딱 만나서 새로 시작한 거거든요.

 

그래서 사실 '아메닉'에 대해서, 제가 이제 '아메닉'이 계속 이어지게 하지 못하고 문을 닫는 그 마지막 장면에 있었던 게 좀 창피하고 부끄럽고 너무 속상하거든요. 저는 근데 되게 좋은 시도였다고 생각이 들어요. 좀 제가 보는 제 선배들은 그 시작을 진짜 멋있게 시작했고 애초에 우리가 시작할 때 정관 만드는 과정에서 만약에 우리가 문을 닫는다면 반드시 꼭 총회를 열어가지고 회원이나 그런 사람들의 의견을 다 수렴해가지고 정말로 다 같이 흐지부지하지 말고 공개된 대로 해서 서로 의견을 나누고 끝내자 했는데 정말로 마지막에 이렇게 창립총회 하듯이 총회를 했었거든요. 그래서 그것도 좀 일관성 있게 잘 시작하고 잘 끝낸 것 중에 하나라는 생각은 좀 들고요.

 

 

: 그러면 '아메닉'과는 설립부터 해체까지 쭉 함께 하셨던 거네요.

 

: 그렇죠, 저는 계속 그걸 다 봤죠. 그 변화가 시작되는 시기에 제가 우연히 그걸 보게 된 것 같아요. 진짜 너무 재밌고 너무 멋있었어요. 진짜 이렇게 같이 해서 시너지가 되게 컸던 거기도 하고, 모두가 영화광들인데 또 각자가 가진 재능이 조금씩 다른데 그 재능이 한꺼번에 합쳐지니까 좀 어벤저스 같은 그런 느낌이 정말 들더라고요.

 

: 그때 시네마테크가 어쨌든 사람들이 있고 공간을 쓰고 이러면 돈이 있어야 되잖아요.

 

: 일단 표를 팔기는 했어요. 근데 이제 보증금 같은 경우 지금 제 기억이 맞는지 모르겠는데, '7예술'의 원래 대표인 김희경 선배가 '아메닉'에서도 초대 대표를 했었거든요. 제 기억에 김희경 대표가 또 이렇게 독특한 사람인 게, 영화를 좋아하지만 영화를 가지고 돈을 버는 건 어렵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리고 이게 그냥 상업 영화도 아니고 이렇게 우리가 좋아하는 다양한 영화나 이런 걸 틀었기 때문에. 이분은 되게 열심히 이렇게 돈을 잘 버는 직장인이었어요. 그래가지고 돈을 벌어 와가지고 저희 공짜로 영화 보여주고 밥 먹여주기도 하고 제 기억에 이분이 모은 돈으로 우리 사무실 보증금을 만들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나중에 벌면 갚겠다는 차입의 형태를 했기 때문에 언젠가 이게 사업이 될 수 있도록 해보자고 했었어요. 그게 제가 생각해 보니까 그 1년을 하면서 돈을 많이 버는 영화제도 했는데 그게 불법이라고 신고를 당해가지고 몇 백만 원의 벌금을 더 내고 이러면서 결국은 생각했던 수익화를 못하는 그런 과정으로 갔어요. 그래서 이걸로 돈을 벌려고 하는 거는 오히려 양립하기 어려운 걸 수도 있겠다거나, 정확히 결론이 난 건 아닌데 이런저런 복잡한 상황들이 있어가지고 오히려 그다음 해에는 이렇게 돈은 좀 포기했어요. 사실은 이제 운영비를 조달할 건 없지만 그냥 독립 영화 상영이라든가 이렇게 가치 있고 좋은 영화들, 극장에서 볼 수 없는 것들을 상영하는 방향으로 좀 선회한 느낌도 좀 있기는 해요.

 

돈 문제는 너무 심각해서 자본이 있었다면 인력이 훨씬 더 많았을 테니까 풍요롭게 굴러가서 완전히 다른 그림이 될 수 있었을 거라는 건 확신이 좀 들고요. 근데 이제 돈이 없는데도 그냥 그걸 일구어냈다는 그런 가치가 있는 느낌이긴 하네요.

 

: 근데 그때 시네마테크라는 게 사실은 비디오를 상영했던 거잖아요. 그때 비디오를 상영을 하는 게 엄밀하게 말하면 불법이잖아요. 제가 듣기로는 서울권 비디오테크에서는 되게 비싸게 표를 팔았다는 얘기도 들리더라고요.

 

: 저희는 3000~5000원 됐던 것 같습니다.

 

: 당시 기성 영화관의 표가 얼마 정도였나요?

 

: 5000~7000원 그쯤이었던 것 같긴 한데, 이건 근데 진짜 조사를 해야 될 것 같은 게 극장보다 더 비싸게 팔지는 않았고요.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 공간이 150명이 들어올 수 있으면 그만큼의 비용이 들기 때문에 이렇게 대관료라든가 이런 게 있잖아요. 그죠? 거기에서 이제 표를 파는 저와 이렇게 한두 명 상근 직원들이 있으니까 인건비를 생각해서 마진이 맞는 선에서 한 사람이 내야 되는 금액이 얼마인가, 또 이런 식의 나름대로 합리적인 계산을 했던 것 같기는 해요. 3000~5000원 그 정도였던 것 같아요.

 

: 근데 지금 같은 경우에는 좀 이렇게 불법으로 하는 거를그러니까 저는 불법이 나쁘다는 생각을 솔직히 안 하는 사람인데, 뭔가 과거 소식들을 보면 좀 대규모 그러니까 그것도 소규모로 할 수 있지만 어쨌든 대규모의 상영회를 진행했던 것 같거든요.

 

: 신문에도 광고를 했잖아요.

 

: 그렇죠. 근데 뭔가 저한테 지금 그런 걸 하라고 하면 좀 겁낼 것 같거든요. 근데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어떤 사고방식이 뭐였을까요, 그 감정이.

 

: 그거 되게 중요한 것 같아. 그때는 아니, 수입 자체를 금지했던 영화를 상영한 거였어요. 아니 왜 일본 영화 <러브레터>를 왜 수입을 금지해, 아니 왜 프랑스 영화 이걸 왜 수입을 안 해줘 이런 식의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불만이 있었어요, 그리고 그 불만에 대해서 오히려 이렇게 법이 잘못됐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굳이 지키는 것은 일종의 방관일 수 있잖아요. 또 그래서 거기에 대해서 나름대로 이렇게 사회적 의사 표현을 하는 과정인 면이 정말로 있었어요. 그리고 너무 보고 싶은 영화를 이렇게 재능 있는 사람이, 어떤 영화광이 그냥 번역을 해가지고 전국의 시네마테크에 돌린단 말이에요. 그러면 전국의 시네마테크에서는 시네마테크에 오는 소모임 사람들을 볼 수 있는데 그걸 보고 싶은 사람은 훨씬 더 많다는 걸 우리가 알잖아요. 그럼 그 사람들한테 보게 해줘야 되지 않나? 20대에 우리는 이게 옳고 정당하다 떳떳하다라는 생각까지 했던 것 같아요. 근데 지금 우리 시대가 이제는 그래도 달라진 부분들이 있어서, 그렇죠. 이렇게 사회적 룰을 지키는 것을 통해서 변화로 이어질 수 있는 여지가 있기도 하고 사회적 의무를 지키는 것이 오히려 사회적 약자나 소외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이기도 하기 때문에 90년대의 그때와 지금이 정말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때는 당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 지금도 뭐 가령 영화 도둑 일기같은 책도 있는데요, 최근에. 시네필들은 이제 불법으로 당연히 보죠. 근데 '씨네스트' 같은 자막 사이트를 통해서 자막을 공수하고 파일은 당연히 수입이 안 되는 영화가 훨씬 많으니까 그런 건 자연스러운 건데 지금은 그거를 공개적으로 하지 않는 것 같아요. 해도 좀 소수로 이렇게 하거나. 근데 궁금한 게 말씀하신 것처럼 그런 의식, 그러니까 그거는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그런 법이 부당하다는 의식이 있을 때 그걸 위반하는 경우는 많지만 법을 행정적으로 조정하거나 이런 시도는 보기 어려운 것 같거든요. 그때는 혹시 그런 의식이 강했다면 뭔가 이런 수입이 안 되는 상황 자체를 좀 조정하려는 것과 같이 좀 어떤 운동적인 게 있었을까요?

 

: 이게 지금 제가 되게 내용적으로 제가 잘 모르고 그 약한 부분인 것 같은데요. 그 시대에 또 뭐가 있었냐 하면은 오히려 스크린 쿼터를 지키는 운동이 있었어요. 그리고 좋은 영화, 다양한 영화를 보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구를 막는 그런 제도가 굉장히 편협하고 이상한 거에 비해서 그다음에는 갑자기 영화를 수입하면 돈이 되니까 이렇게 문화적 자생력이라는 거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수입해서 한국 영화 문화의 저변을 황폐화시키려는 게 또 있었어요. 이런 식으로 언제나 시스템이나 자본은 이렇게 사회적 가치나 사람들의 요구 말고 뭐가 돈이 되는가라든가 아니면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뭘 원하는가 거기에만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그렇게 부당하다고 느껴지는 모든 것에서도 다양한 움직임이 있었던 것 같기는 해요.

 

그래서 이게 그거를 어떤 제도적인 방식으로 표현을 했던 것 같기는 하거든요. 그런 활동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때는 완전 데모를 하는 방식은 아니지만, 운동을 하고 '한국독립영화협회'가 생기고 그러는 과정에서 이 사람들은 끊임없이 선언을 하고 그랬어요. 지금에 와서도 어떤 사회적인 주제가 있을 때 관련된 사람들이나 전문가들이 성명서를 통해서 입장을 발표하고, 영향력을 미치고, 사회적인 목소리를 내고 그다음에 둘러둘러 사회의 여러 가지 현상들로 이어가는 그런 것들이 되게 세련된 방식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런 활동들을 했었던 걸로 저는 좀 기억이 나요. 그래서 어느 날 결국은 그 영화들의 수입은 당연한 거 아니냐, 이렇게 상식으로 받아들여져 가지고, 그때 불법으로 틀었던 영화들이 정말로 극장에 걸리는 거를 보게 되었죠. 그런 것들이 영화 운동의 결과 중에 하나인 것 같기는 해요.

 

: 두 가지 질문이 있어요. 좀 엄청 거시적인 질문일 수도 있는데요. 첫 번째는 말씀하신 것처럼 2004~2005년 정도 되면 외화 수입도 활발해지고 좀 되게 정식화가 된다고 해야 되나, 그런 상황이 오기도 하고, 딱 마침 그때 이제 이 영화제도 생기고 하면서 영화의 자생적 움직임이 싹 사라지더라고요. 그러니까 뭔가 그 시기에 제도적으로 영화 문화를 탄생시키려는 순간 (그것이)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러면서 관객 문화가 확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러니까 돌아봤을 때 결국 이제 ‘<러브레터> 같은 영화들을 극장에서 안 틀어주니까 우리가 상영을 한다라는 어떤 위반의 정서 같은 것이 생길 수가 없는 토양이 되는 순간 뭔가 이런 단체들의 활력이 사라진 건 아닐까라는 가정이 있고요. 그거에 대해서 좀 여쭙고 싶은 부분이 하나있거든요.

 

그리고 한 가지 더 궁금한 건, 가령 저희가 이런 걸 할 때 90년대 분들에 대해 뭔가 자서전을 써주는 건 아니잖아요. 저는 사실은 직설적으로 얘기하면 그때 좀 실패가 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90년대 사람들의 실패가. 그 결정적인 지점이 스크린 쿼터 운동의 전후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좀 하는데요. 가령 당장 며칠 전에 <베테랑2>를 보러 갔었는데 극장에서 상영되는 회차의 한 95% 정도가 <베테랑2>, 사실 어떤 그런 수직 계열화 같은 것들이 생기기 시작한 것도 한국 영화를 보존하는 입장에서 그들이 어떤 연합을 이룬 것도 좀 결과적으로는 있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까 스크린 쿼터 수호단들이 관객 수를 체크를 하기 시작하면서 시장이 투명화 되고, 그 투명화된 시장에 대기업이 들어가기가 너무 쉬워졌던 건 아닌가, 그것이 이제 국가적인 어떤 내수 상품과 결합이 되는 그런 과정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아무튼 하는데요.

 

그것과 별개로 어쨌든 말씀하셨던 것처럼 90년대 관객들은 한국 영화에 대한 애호가 많이 없었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뭔가 외국 영화, 오히려 그러니까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특히 그 시대에 보면 일본 영화는 <하나비> 같은 영화 말고는 상영이 안 됐으니까 일본 영화를 많이 틀었더라고요. (그런데 과거의 이런 기조에도 불구하고) 2000년대 초반이 되면 스크린 쿼터 운동이나 또 어떤 인적 자원의 측면에서 많은 연합이 이루어진 것 같더라고요. 그러니까 그런 계기가 뭔가 저한테는 되게 도약이나 어떤 비약으로 느껴지는데, 선생님께서 복판에 계셨을 때는 어떤 심정이었을지 궁금해요.

 

: 사람들이 함께 모였을 때 자주 이야기되는 영화가 가장 사람들이 좋아하고, 관심을 가지고, 중심이 되는 영화잖아요. <접속>이라는 영화가 나왔을 때, 그때가 뭔가 한국 영화의 변화가 시작되고, 그러니까 한국 영화의 질적인 상승이 있고 거기에 대해서 관객들이 좀 더 한국 영화가 괜찮게 잘 만들어지고 있다라고 반응하기 시작한 시기였다고 좀 생각이 드는데요. <접속>에 대한 얘기를 한 달에 한 번 만나면 매번 했어요. 그전에 어떤 영화광들은 대놓고 한국 영화가 별로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아니면 영화를 만드는 활동을 하면서 새로움을 스스로 만들려고 하는 사람도 있었을 텐데 그 모든 사람들이 약간 충격을 받고 놀라는 장면을 제가 봤던 것 같아요. 근데 그때도 왜 저렇게까지 흥분하지라는 느낌을 저는 받았는데, 저는 제가 (영화와 관련된) 운동을 하는 그런 입장이라고 생각을 못해서 그런 게 있었을 거예요. 아무튼 그다음에도 우리가 상영회를 하면서 극장에 걸리는 한국 영화에 대해서 감명을 받고 토론하는 그런 비중이 점점 더 높아지는 게 사람들 만나서 영화 보고 밥 먹고 얘기할 때 일어나는 일이었거든요.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사회적으로 한국 영화 자체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대해서 그런 관심의 변화는 저절로 생긴 거예요.

 

제가 이제 상근하면서 일을 할 때는 주로 독립 영화 다큐멘터리나 예술적인 실험 영화들이 좀 많았던 터라 그런 다큐멘터리 정기 상영회를 위주로 하면서 그 내용은 이제 충무로 한국 영화하고는 이렇게 평행선을 달리는 게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정확하게 제가 있는 '아메닉'이 어떤 충무로 영화의 변화 같은 것에 어떻게 맞물려 돌아가는지에 대해서는 감조차 없어요. 제가 기억하지 못하거나 관여하지 못했거나, 제가 내용적으로 모르는 것 같기는 한데요.

 

그리고 아까 앞에 동현 씨가 그런 건 아닌가 추측한다고 말씀하셨던 것들이 저는 맞아요, 맞아요 하고 다 동의할 수밖에 없는 내용들이었어요. 실제로 90년대에서 2000년대, 그리고 지금까지 흘러오는 이 영화에서의 거시적인 흐름에서 늘 어떤 시도는 있었으나 그 시도가 실패하고 그 실패한 자리에 좀 더 힘이 있거나 혹은 기회를 포착한 어떤 세력이 들어갔는데 그게 대기업이 아닐까라는 것은 조심스럽게 말하지 않아도 지금 우리한텐 현실이니까요.

 

영화에 있어서 우리가 우리 삶에서 인간에게 중요한 가치라는 거를 좀 더 추구하려는 사람들은 그러면 그때 뭘 했어야 되는가라는 그런 질문을 하면서 또 지금도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겠구나 하고 막연하게 짐작을 했는데요, 그걸 지금의 시네필들이 하고 있는 거잖아요. 사실 저는 요즘 사람들은 이제 불법으로 영화 보는 일이 없을 거라는 그런 순진한 생각을 하고 살고 있었어요. 그래서 아까 들으면서 지금도 여전하구나 싶었어요. 세상은 언제나 이렇게 새로운 흐름이 오히려 낡은 게 되기도 하고 그런 변화 속에서 현실의 모든 게 완벽하게 좋을 수 없잖아요. 그리고 언제나 횡포는 있고. 권력의 횡포든 뭐든. 거기에 대해가지고 그 사이에서 좀 더 나은 걸 찾고 싶어 하거나 적어도 내 자아를 제대로 된 곳에 투영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런 사람들은 언제나 영화에 가장 많을 수밖에 없는 거라는 인상을 예전에 90년대 제가 받았고 지금 오늘 또 여러분들을 보면서 받고 있거든요. 일단 응원하는 마음이고요.

 

그리고 그 90년대의 실패라는 말은 공부하신 내용 그대로 받아들여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굳이 덧붙일 필요가 없는 게 저는 그 실패에 가담조차 못했던 사람이었던 그런 느낌이 좀 있어요. 이렇게 정신없이 흘러가다가 보니까 뭔가 여러 가지 흐름이 있었는데 그게 툭 끊겼구나 라는 인상을 갖고 있는 것 같네요.

 

 

 

  《 이영은과의 대화 3에서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