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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불문! 대구독립영화

한국 실험영화에 대한 필름메이커 I와 영화도둑 H의 대화 - 동시대편, 나가며 (4)


한국 실험영화에 대한 필름메이커 I와 영화도둑 H의 대화 - 들어가며 (1)
한국 실험영화에 대한 필름메이커 I와 영화도둑 H의 대화 - 역사편 (2)
한국 실험영화에 대한 필름메이커 I와 영화도둑 H의 대화 - 동시대편 (3)
한국 실험영화에 대한 필름메이커 I와 영화도둑 H의 대화 - 동시대편, 나가며 (4)

『한국 실험영화에 대한 필름메이커 I와 영화도둑 H의 대화』는 총 4화에 걸쳐 연재된다. 1화에서는 실험영화에 대한 대담자들의 개괄적 사유를, 2화부터 4화까지는 한국 실험영화의 주요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 예정이다.
본 연재는 7월 4일 토요일, 오오극장의 기획 상영과 연계하여 진행된다.

 

 

일환: 어떤 실험영화는 만들어진다는 것 그 자체로 정치적이다.

 

민수: 역사편에서 잠깐 얘기했던 채기 감독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당신 영화의 정치적인 측면이 무엇인가”라는 토니 레인즈의 질문에, “이런 방식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 자체가 정치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일환: 필름메이커가 단 하나의 아이디어를 고안하고, 정초한다. 그리고 그것을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하려 한다. 이것은 실험영화의 중요한 정신이다. 객석의 관객들이 느낄 피로에 대해 그다지 고민하지 않는다. 외려 고통을 주기도 한다. 이것은 엔터테인먼트가 아니고, ‘독립’된 것이기에 가능하다. 물론 그 아이디어 하나로 작품 전체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는 무수한 선택지가 있다. 하나의 마디를 반복하고, 변주하고, 중첩함으로써 정초해 두었던 아이디어를 지켜낸다. 그 세부적인 선택지들, 디테일이라고 할 것에 신성이 깃든다. 그렇게 영화가 완성된다.

 

필름메이커의 정신과 의지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것을 어떻게 상영해야 하느냐는 근본적인 물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영화관과 갤러리의 방식과 경로는 고착화되어 있다. 아이디어가 파격적일수록, 그 사회에서 빈틈을 찾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겠다. 자신만의 장소와 방법을 만들어야 하는 경우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실험영화는 늘 “그럼에도 불구하고”이지 않나,) 난관을 극복하여 우리와 만나게 되는 영화들이 있다. 나는 이러한 영화들과 이에 깃든 작가의 정신에 대해 무한한 존경심을 갖고 있다. 당장 생각나는 것만 하더라도, 토니 콘래드의 <플리커>(1966), 그레고리 마르코풀로스의 <가멜리온>(1968), 마이클 스노우의 <중앙지역>(1971), 테오 에르난데스의 <마야>(1979), 스탠 브래키지의 <통과: 의례>(1990), 제임스 베닝의 <열 개의 하늘>(2004)... 

 

그러나 동시대에 이러한 영화들은 흔하지 않다. 

 

민수: 구조주의 영화라고 불리는 것들이 대체로 그러하지 않나?

 

일환: 그렇다. P. 아담스 시트니의 방식처럼 구조주의 영화를 유형화하여 정의할 수도 있겠지만, 구조주의 영화를 가장 잘 설명하는 대목은 역시 하나의 아이디어가 아닐까. 그들의 아이디어는 하나의 문장으로 설명된다. 그리고 특정한 단위가 반복되고 변주되는 구성을 갖는다.

 

그렇지만 구조주의 영화는 현시점에서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과거의 구조주의 영화들을 레퍼런스 삼아서 만들어지는 영화들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영화 역사의 일부에 관한 소재화인 것이지 구조주의 영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구조주의 영화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은 하나의 아이디어와 그것을 구성하는 마디들의 변주와 반복이 될 것이다.

 

민수: 반복과 변주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작년에 거의 전작을 몰아서 보게 된 리처드 투오이와 다이애나 배리의 작품들이 생각나는데… 일환이 생각하는 ‘좋은’ 구조주의 영화와 ‘나쁜’ 구조주의 영화의 차이도 궁금하긴 하지만 좀 더 캐묻지는 않겠다. (웃음)

 

나는 음악에서도 변주곡들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언젠가는 변주곡들만을 모아서 리사이틀을 열어보는 게 꿈이다. 바흐, 라모, 클라라 슈만 등. 돌이켜보니 내가 좋아하는 많은 실험영화도 구조주의 영화들이 꽤 많더라. 

 

일환: 너무 많은 영화가 있듯 너무 많은 글이 있다. 영화는 사회와 맞닿을 표면적을 넓히기 위해 적지 않은 외부의 개념과 결탁하려고 한다. 간결함은 이 과정에서 사라진다. 우리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 이전에는 아무도 생각해본 적 없던 아이디어’와 일대일 대응하는 작업을 기다리고 있다. 혹은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과 영화를 만드는 방식이 겹쳐지는 작업들.

 

하나의 아이디어를 정해두고 그 안에서 세부 사항을 발전시키는 방식으로 필모그래피를 구성할 수 있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인생에 걸친 긴 하나의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알렉상드르 라로즈의 <안개>(2008–2015) 연작, 로즈 라우더의 <부케>(1994–2022) 연작, 헬가 판데를의 《성좌》, 앤 샬롯 로버트슨의 <5년간의 일기>(1981–1998), 자넷 무뇨즈의 <푸춘카비>(2014–)가 대표적이다. 특히 자넷 무뇨즈는 긴 기간에 걸쳐 하나의 영화를 계속해서 만들어 가고 있다. <푸춘카비>를 만드는 열정은 ‘하나의 아이디어’를 관철하고자 하는 작은 영화인의 삶을 잘 보여준다. 

 

동시대 한국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작업하는 작가가 있다. 진솔하고 허례 없이 일상을 옮길 뿐이지만, 우리는 그 시간의 축적이 가진 정치적인 힘을 안다. 본래 사진가인 휘휘는 긴 기간 촬영해 온 수천 장의 사진을 16mm 필름 위로, 영화로 옮겨낸다. 그녀의 <사진소설>(2023–)은 그런 영화다. 이 영화는 2011년부터 촬영된 사진들로 구성되며, 2023년부터 작품화되었고, 시기에 따라 확장되며, 여러 버전을 갖고 있다.

 

Still from bezejmenný (2024) / Credit: courtesy HwiHwi

 

민수: 휘휘의 영화들은 운이 좋게도 스페이스 셀 워크숍 상영회에서 필름으로 다수 볼 수 있었다. <사진소설>도 이번 전주에서 상영된 버전이 아니라 스페이스 셀에서 초기 버전으로 보았고, 이번에 우리 기획에서 연계 상영하는 <이름없는>(2024) 역시 필름으로 처음 접했다.

 

체코에 머무는 동안 찍은 사진들을 모은 <이름없는>은 당시에는 좀 쓸쓸한 영화라는 인상으로 남아 있었다. 아마 프린트해서 나누어 준 전단지의 시놉시스에 “지나고 나니 시시하더라”는 문장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건 기억의 오류일 수도 있다. 과거의 연인으로 추정되는 이와 함께 찍은 사진도 반복해서 등장했던 것 같고… 그러한 사적인 추억들이 1/24초 단위로 휙휙 바뀌는 데서 오는 덧없는 인상 같은 것들… 아무튼 그 작업은 단순히 체코에서 보낸 시간에 대한 회고라기보다, 사진을 통해 과거를 다시 붙잡으려는 시도와, 그 과거가 계속해서 손에서 빠져나가는 감각이 동시에 있는 영화처럼 느껴졌다. (근데 이번에 상영을 준비하며 다시 보니 더 눈에 들어왔던 건 그러한 사진들의 배열을 통해 화면의 리듬을 만들어내는 감각이었다.)

 

일환: 하나의 아이디어라는 존재가 좋은 실험영화가 되기 위한 필수적인 사항은 아니다. 하나의 아이디어를 고집한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영화인 것도 아니다.

 

이전과 다를 것 없는 형식의 삶 속에서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상상해보자. 우리는 카메라를 들고 주위의 가장 가까운 것을 찍어보기 시작할 것이다. 방 안, 반려견, 부모님, 산책길, 학교, 친구, 연인의 모습이 뷰파인더 안에 들어온다. 이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영화가 되거나, 새로운 영화를 위한 아이디어의 초석이 될 것이다. 형식적인 아이디어만이 실험영화의 힘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삶과 동기화될 수 있는 이미지에서 이미지로의 시간에 대해, 그 힘에 대해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문화의 현황과 산업의 규격을 따르지 않고도 우리는 영화를 향한 동기를 찾아낼 수 있다.

 

민수가 대학교 과제용으로 만든 영상을 보내준 적이 있다. 브루스 베일리의 <All my life>(1966)를 패러디한 영상이었다. 본인 자취방 안을 빙글뱅글 패닝하는 것이었다. 방 안이 더러워서 좀 놀랐다. 나는 처음 카메라로 무언가를 만들어 보고 싶다고 결심했을 때, 군 입대를 앞둔 친구를 인터뷰했었다. 이처럼 카메라를 서툴게 잡은 인간은 나와 닿아 있는 사물을 새롭게 포착해 보고자 한다. 이 본능적인 태도를 기억하는 일은 중요하다.

 

민수: 일환 버전 <군대에 가고 싶지 않은 마음>(장윤미의 데뷔작)이 나올 뻔했군.

 

일환: EXiS에서 우테 오란드는 말했다. “당신이 현재의 장비에 만족하고 있다면, 굳이 그것을 바꿀 필요는 없다고.” 그녀는 필름에서 디지털로의 전환에 관해 말한 것이겠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우리 세대로, 반대로 적용할 수도 있겠다. 우리는 당장 손에 잡히는 디지털 카메라로 주위를 찍을 수 있다. 필름은 우리에게 ‘뉴미디어’가 되어버렸기에. 아이폰으로도 실험영화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익숙해져 더 이상 촬영의 감격이 느껴지지 않는 시점에서는, 우리는 다른 장비로 넘어갈 수 있다. 슈퍼8이나 16mm로, 새로운 방식으로 익숙한 세계를 마주하는 것이다.

 

실험영화라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산업의 조직이 침범할 수 없는 영역에서 초연하게 버텨내는 개인의 시선, 그것으로도 온당하다. 더 이상 혁명의 이름과 저항의 이념은 단순하게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실험영화도 마찬가지다. 가장 진실된 형태의 삶을 전시하고 공유하는 행위들에서 어떠한 가능성들을 발견하게 된다.

 

최보윤의 <카메라를 든 사람>(2024)은 그녀가 스페이스 셀 워크숍에서 처음으로 볼렉스를 잡은 시점에 만든 작업이다. 우리는 그 감각을 공유받을 수 있다.

 

민수: 정확히 내가 이 영화를 보고 좋았던 것도 그 감각이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당시에 내가 아마추어리즘에 대해 경도되어 있기도 했고… 

 

일환: 그리고 이후 만든 <여름, 매미>(2024)는 구조주의 영화의 형식성을 가져온다. 익숙한 세계를 향한 낯선 시선, 그리고 반복과 변주, 중요한 태도의 키워드가 그녀의 초기작으로부터 발견된다.

 

반대로 여정을 떠난 낯선 타지에서 카메라를 들게 되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는 완숙된 필름메이킹의 방식과 인간으로서 해당 공간에서 느끼는 생경함이 결합하여 독특한 분위기의 작업이 나오는 경우들이 있지 않은가. 장혜연의 <(k)now (t)here>(2011)도 그러한 경우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영화가 내가 본 한국 실험영화 중에서 가장 몰입력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쇼트가 전개되는 리듬감이 사운드 트랙이 없다고 가정해도 무척 강렬하다고 생각된다. 혹시 미러스 엣지라는 1인칭 시점의 파쿠르 게임을 아는가? 10대 시절에 한 시간 정도 하다가 어지러워서 그만둔 기억이 있는데, 거의 그 게임처럼 분주한 여정의 궤적으로 공간들을 뚫어나간다는 운동의 감각을 나에게 전달하는 영화다.

 

민수: 미러스 엣지 당연히 해봤다. 아마 그거 어릴 때 플레이 영상 본 사람들은 직접 해보고 싶어서 다 깔아봤을 걸.

 

일환: 혹시 그것도 해적처럼 다운받았나?

 

민수: 당연하지... 웹하드에서 50원 내고 다운받았다.

 

일환: (음...) 본래의 논지로 돌아와서, 왜 막 카메라를 잡은 서투른 감각이 중요한가?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그 시기에 뷰파인더 안 세계를 가장 충실하게 바라보기 때문이다. 뛰어난 인간은 시간의 풍화에 무뎌지지 않고 사랑의 형식을 지키겠지만, 특정한 계기 없이는 그렇지 못하는 게 일반적이다. 영화라는 것도, 끝없는 자기경계와 자각을 통해 쟁취해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세계를 보는 순수한 시선을 유지하는 일이다.

 

나는 이런 필름메이커이자 관객으로 남고 싶다. 그 카메라와 그 세계가 조우한다는 운명의 환희를 긍정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필름메이커는 실로 무한한 경우의 수를 뚫고 아주 작은 프레임으로 세계의 특정한 순간들을 담아낸다. 그 프레임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가? 익숙한 사물은 어떠한 모습으로 새롭게 자신을 드러내고, 낯선 풍경 앞에서 카메라는 어떠한 방식으로 그것을 맞이하는가? 

 

데이비드 개튼은 사석에서 피터 허튼에게 묻는다. 왜 매일 똑같은 노을 풍경을 찍느냐고. 이에 대해 피터 허튼은 답한다. 그것들은 모두 다르다고. 수평선 너머로 지는 노을의 풍경은 전부 같은 단어로 통칭될 수 있다. 그러나 허튼의 말처럼 그것은 시각적으로 모두 완전히 다른 것이다. 허튼이 세계를 보는 방식은 (실험)영화에서 바라본다는 행위의 가치가 가진 중요성을 잘 말해준다. 이에 개튼은 한 편의 영화로 회답하기도 했으니. 조나단 승준 리의 <빛을 향한 수행>(2026) 역시 1년에 걸쳐 바다와 노을을 담은 걸작이지 않나. 

 

그런데 요즘 무빙이미지 중에는 프레임 안 세계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지 별다른 관심이 없는 작업들도 많다. ‘무엇’을 촬영했다는 하나의 개념이 한 쇼트의 존재 의의를 대신하고, 그 개념마저 영화의 논리를 위한 합성의 성분으로 소진되는 경우다. 이것은 절망적이다. 우리는 우리의 인식 밖에 세계가 있고, 그 이미지로부터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런 영화들은 주로 텅 비어 있는 복도, 혹은 별다른 변화나 불씨가 없는 풍경 이미지를 단위 삼아 구성된다. 또한 폐허에 대한 집착을 보이기도 한다. 약간은 다른 화제이지만, 진정 폐허를 촬영하고 싶다면, 수없이 졸업영화 안으로 옮겨지는 재개발 구역을 찾아가서 패닝 몇 번 돌리고 철수할 것이 아니라, 직장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도시의 중심부터 출발하는 것이 맞다. 두 장소의 실질적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민수: 감독의 입장에서 할 만한 이야기라 재밌게 들린다.

 

일환: 파운드 푸티지 작업들도 발견한 자료를 스캔하고 편집해야 한다는 지점에서 카메라와 세계가 조우한다는 큰 틀에서 예외적이지 않다. 오히려 발견된 자료 안에 어떠한 세계가 담겨 있는지 다른 방식의 작업들보다 더 필사적으로 탐독해야 할 의무가 부과된다. 왜냐하면 그 만남은 촬영을 거치는 통상적인 작업과는 다르게, 육체를 통한 일상적인 경험이 아니기 때문이다. 평면 안의 대상을 보는 시각과 그 평면 자체를 만지는 촉각으로 여건이 제한된다. 민수가 앞서 언급하기도 했던 동시대 에세이 영화들의 공통된 파운드 푸티지 운용 방식, 그것이 어딘가 어설프다고 생각되는 까닭도 다름이 아닐 것이다. 디지털 편집 툴 내부로 작업 환경이 제한되기 때문이다. 모든 행위가 평면 안에서 전개될 뿐이다. 그곳에서의 상상력이란 무엇인지 더 연구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담이지만 디지털 파운드 푸티지 작업은 카메라를 경유하지 않기 때문에 일관된 표면의 감각으로 이 푸티지와 저 푸티지 여럿을 연속적으로 통일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비를 괴랄하게 높이는 후보정과 불필요한 자막 쏟아내기가 그것의 돌파구는 아닐 것이다.

 

1화에서 민수가 언급한 피터 체르카스키처럼 파운드 푸티지를 활용하는 방식도 물론 위대한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동시대에 유독 간과되는 ‘발견’과 ‘관찰’의 미덕은, 예르반트 쟈니키안 & 안젤라 리치 루키, 페테르 포르가츠, 빈센트 모니캔담, 페터 델푀트 등의 작업이 대표격으로 잘 보여주지 않나 싶다. 과거에 일민미술관에서 이들 중 몇 명을 포함한 전시가 있기도 했는데, 현시점에서 이러한 영화들의 태도를 다시 한 번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그런데 사실 한국은 파운드 푸티지 작가가 유독 많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민수: 한국에서 전통적인 파운드 푸티지 작업을 오래 밀고 온 작가를 꼽자면 김경만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김경만의 진정한 걸작은 그의 파운드 푸티지 작업보다는 초기 ‘습작’인 <우린 봉사한다 - 나는 아저씨들에게 어떤 연기를 시켰나>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는 순수한 파운드 푸티지 작가가 많다기보다, 아카이브 영상과 기존의 이미지들을 촬영·인터뷰·내레이션에 섞어 쓰는 다큐멘터리와 미술영상 작업이 많은 것 같다. 박찬경, 박경근, 임흥순, 정윤석 같은 작가들이 우선 떠오른다. 

 

일환: 실험영화와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구분 짓는 일은 쉽지 않다. 스탠 브래캐지도 본인의 작업이 다큐멘터리라고 하기도 했고. 가령, EXiS에서 상영된 적 있는 츠지모토 노리아키나 페터 네슬러, 페트릭 킬러, 장-다니엘 폴레는 실험영화보다는 다큐멘터리 작가이지 않은가. 나는 다큐멘터리 안에서 실험영화적인 감흥이라고 할 것을 공유하는 작업들을 정말 좋아한다. 한국 작품으로는 김응수의 <물속의 도시>(2014)이나 <천상고원>(2006) 같은 영화들이 떠오른다. 개인적으로 매우 뛰어난 영화들이라고 생각한다.

민수: 김응수의 그 영화들은 아직 보지 못했다.

 

일환: 여기서 더 관찰적인 입장으로 이동한 영화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뷰파인더를 통해 프레임 내 세계를 바라보는 영화가 언어적 서술을 최소화할 경우, 실험영화와 다큐멘터리, 더 엄밀하게는 실험영화와 다이렉트 시네마의 경계가 맞닿는 지점에 놓이게 된다. 나는 이런 실험적 다큐멘터리를 필름메이커이자 프로그래머로서 가장 애정한다. 이런 작업은 언어적이고 직설적인 주제, 이론, 교훈, 시의성을 중시하는 한국의 분위기 속에서 잘 만들어지지 않는 유형이기도 하다.

 

예시로는 비토리오 데세타의 단편 영화들, 샹탈 아케르만의 <동쪽>(1993), 벨루 비스와나단의 <강가>(1985), 로버트 가드너의 <축복의 숲>(1986), 로버트 펜즈의 <혁명에 대한 명상>(1997-2003) 연작, 마크 라포레의 <글래스 시스템>(2000), 피터 허튼의 <바다에서>(2007), SEL의 <리바이어던>(2012), 엘케 마르회퍼의 영화들, 대표적으로 <아니, 난 두꺼비가 아니고 거북이요!>(2012) 등이 있다. 한국의 작품으로는 조혜정의 <향항>(2008)도 이들과 같은 선 위에 놓일 수 있는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민수: 일환이 어디에 끌리는지 잘 알겠다. 그러한 작업들이 다큐멘터리 역사에서 분류하는 다이렉트 시네마와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일환: 인물의 발화를 담지 않는다. 정확히는 말의 의미를 전달하지 않는다. 감각적 맥락에서 말의 소리는 담길 수 있겠다. 고전적인 다이렉트 시네마라면 찍지 않을 것 같은 대상이나 특수한 구도를 거듭 보여주는 경우도 많다. 시각적인 강렬함이나 카메라의 특수한 효과라고 할 것에 탐닉되는 지점이 용인되는 것이다. 그리고 프레이밍과 영화 전체의 구성을 통해서 희박하게 형성하려는 작품의 논지가 존재한다. 그렇기에 이들에게 있어 프레임 설정이 무척 중요할 수밖에 없다. 영화와 쇼트를 구성하는 기초적인 성분들에 대한 완숙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이러한 방향으로 훌륭한 영화를 만들기가 어려운 것이다.

 

Still from A Scented Port (2008) / Credit: courtesy Cho Hye Jeong

 

샹탈 아케르만의 <동쪽>에서 가장 인상적인 쇼트는 카메라가 횡방향으로 이동하면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연이어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의 얼굴을 그런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영화의 초월적인 권능이라고 할 수 있다. 경이로운 촬영이다. 매번 감탄하게 된다. 나는 산책을 할 때면 주로 볕이 잘 드는 곳이나 햇살의 결 따위에 관심을 갖는다. 행인의 얼굴이나 인상착의를 잘 바라보지 못한다. 그래서 주로 시야의 외부에서 그들이 하는 말을 엿듣고는 한다. 그러나 카메라를 든 필름메이커로서의 나는 달라진다. 행인들의 얼굴과 인상착의를 뻔뻔하게 관찰한다. 뷰파인더를 통해서. 외려 그들이 하는 말과 그 맥락은 나에게 닿지 않는다. 이것은 아케르만의 영화를 볼 때 느껴지는 입장과 동질적인 것이며, 홍콩이라는 타국에서 필리핀 가사노동자들의 일상 풍경을 촬영하는 조혜정의 <향항>이 드러내는 위치성과도 일맥상통한다. 직선적이고 견고한 도시의 표면 위에서 펼쳐져 있는 사람들의 정경을 보는 작업들이랄까. 이러한 바라봄의 경험을 공유해 주는 영화들은 교육적인 힘 또한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앞으로 만들고 싶고 틀고 싶은 영화들은 아무래도 이러한 분야와 깊게 관련되어 있다. 더 폭넓게는 ‘실험적 다큐멘터리’ 정도로 통칭되는 작업들…

 

민수: 이번에 상영되는 일환의 작품 <표해록>(2025)에 대해서 설명 해줄 수 있나.

 

일환: <표해록>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로트링겐이 정기적으로 진행하는 ‘쇼트 스터디’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로트링겐에 대해 말해야겠지. 로트링겐은 영화를 만드는 필름메이커들로 구성된 콜렉티브다. KU시네마테크에서 진행하는 상영회는 나와 박규재가 둘이서 기획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기획에는 관여하지 않지만, 필름메이커로서 함께 교류하고 있는 작가들도 몇 명 있다. 2024년에 병영영화제라는 이름으로 진행한 실외 상영회 이전부터, 우리는 모여서 여러 영화를 함께 보던 집단이었다. 

 

로트링겐의 ‘쇼트 스터디’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혼자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워크숍 프로그램이다. 누군가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긴 기간이 필요하고, 스태프가 필요하고, 장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런데 그러한 기준과 무관한 영화도 늘 영화사에서 존재해 왔다. 우리가 하는 일은 극도로 제한된 여건에서 어떠한 창조적 아이디어를 발견하고 그것으로 하나의 완결된 작품을 만들 수 있는가에 관한 방법론적 실험이다.

 

2025년 1월, 우리는 함께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 도착했다. 도착과 동시에 모두 뿔뿔히 흩어졌다. 각자에게는 이틀의 시간이 주어졌다. 이틀 내에 촬영을 하고, 편집을 해서, 영화 결과물을 만들어 제출해야 했다. 이틀 뒤에는 그렇게 제출된 영화들을 한 숙소에서 모여 함께 감상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표해록>은 그렇게 시작된 영화였다. 나는 이틀 동안 서로 다른 네 종의 유람선에 탑승했다. 촬영을 하는 동시에 편집 테이블 위를 상상하며 지금의 쇼트가 어떻게 배치될지를 의식해야만 했다. 

 

같은 워크숍에서 장철웅은 <없는>이라는 작업을 만들었다. 그는 나처럼 특수한 장소를 찾아 움직이지 않고 그저 숙소 주변을 산책하며 이미지를 모았다. 그리고 사무엘 베케트 문학에서 반복 사용되는 특정한 단어를 임의의 피사체와 대응시키는 논리를 만들었다. 베케트의 문학이 나레이션으로 들려오고, 특정한 단어가 지나갈 때마다 그것에 대응되는 이미지가 나타나는 영화였다. 말미에 이르러서는 그 대응의 관계식이 완전히 무너지고 플리커 영화로 변형되는 그런 작업. 이렇듯, 우리는 조금 더 자생적인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고, 어떻게 이를 즐겁게 교류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계속해서 고민해 왔다. 즐거움이라는 키워드는 중요한 것이다.

 

나는 그렇게 제주도에서 이틀 동안 만들었던 <표해록>의 초안을, 서울로 돌아와 세부적으로 다듬는 과정을 거쳤다. 쇼트가 끝나는 프레임의 지점을 숙고할 여유로운 시간이 필요했었다. 그렇게 이 영화는 내 공식적인 첫 작품이 되었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로트링겐은 계속해서 그러한 창작의 방법론을 함께 연구해 나갈 예정이다. 당장 올해 여름에도 서울에서 쇼트 스터디 프로젝트를 한 번 더 진행했었다. 서울에서 진행되는 만큼, 기존 로트링겐 인원만이 아니라 외부의 훌륭한 작가들과 함께해 볼 수 있었다. 필름으로 작업한 작가들도 여럿 있었다. (민수: 시네마토그래프 배급사의 이윤영 대표도 참여했다고 들었다.) 기간이 단 일주일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나는 이전부터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는 영화의 필요성에 대해 생각해 왔다. 각본과 제작 지원 시스템, 그리고 스태프들과 대여 장비가 동원된 현장 안에서의 규칙, 그리고 영화제 선정과 배급으로의 고난길까지, 모든 단계에 대한 의문을 경유해 본다면 영화 자체도 더 창의적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나는 개인 작업을 하지만. (웃음) 사람들은 KU시네마테크의 실험영화 프로그램만으로 우리의 표면을 보고 판단하겠지만, 사실 내부적으로 이러한 분위기를 추구하고 있음을 글로 남기고 싶었다.

 

민수: 상영회만큼이나 흥미로운 프로젝트처럼 들린다. 로트링겐이 진행하는 기획전 말고도, 영화작가이자 기획자인 이들이 진행하는 실험영화 행사들이 많아진 것 같다. 그중에서도 2024년 말 문래예술공장에서 열린 권희수의 프로젝트《임계》의 확장영화 스크리닝은 여러모로 현재의 지형도를 잘 보여주는 중요한 행사였다는 생각이 든다. 참여한 네 팀의 작가(권희수, 박규재, 왕지은/장정우, 이장욱/이민휘)가 전부 다 다른 개성을 갖고 있어서 관객으로서 현장에 있는 것이 즐겁기도 했고. 필름이 타는 냄새도 그때 처음 맡아봤다. 휴먼 인프라스트럭쳐(왕지은/장정우)의 퍼포먼스 중에 모종의 사고로 필름이 약간 탔었는데 본의 아니게 4D 확장영화를 체험하게 됐다.

 

일환: 여러모로 연말 느낌이 잘 나는 감동적인 행사였다. 

 

민수: 근데 막상 그 행사에 내가 좀 늦게 도착해서 자리가 맨 뒷자리라 권희수의 <임계> 퍼포먼스는 당시엔 제대로 보지 못했다. 나는 권희수의 작업들이 실험영화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들에게도 다가갈 가능성이 높은 영화라고 생각하는데… 작품이 친절하거나 명료해서가 아니라, 작품에서 행해지는 빛과 소리의 변형을 관객의 몸으로 직접 겪게 만든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현상자들>이나 <임계>의 라이브 퍼포먼스에서는 관객은 스크린의 이미지만 보는 것이 아니라, 뒤편에서 이루어지는 촬영과 변형의 과정도 의식하게 되고, 자기 몸이 진동하는 감각도 함께 의식하게 되니까. <몬순>은 가장 그걸 극단적으로 끌고 나간 작업이 아닐까 싶다. 근데 가만 생각해 보니 명료한 것 같기도…

 

일환: 권희수의 스펙타클 속에는 분명 명료함과 친절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관객 누구나 같은 상태로 해당 작품과 만나게 해주는 듯한… 그런데 권희수를 비롯해 시청각적으로 강렬히 뻗어나가는 확장적인 작업들과, 그들이 주로 구사하는 요소들을 오용하는 참칭적인 작업들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판단력이 필요한 것 같다. 가령, 전자에 해당하는 작업들은 플리커를 사용한다거나, 듣기 힘든 굉음과 노이즈를 사용하고는 하는데, 그것이 단순히 관객의 말초 신경계를 괴롭히는 목적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들은 그러한 효과를 통해 감각이 타오르고 식는 듯한 변주 속에서, 개별적인 성분들이 갖고 있는 존재감 그 자체와 이들이 연속되면서 만드는 음악성을 우리에게 전달한다. 가학적인 특성은 특수한 시간의 층위를 구축하는 일원인 것이다. 반면 그렇지 못한 후자의 경우, 단순히 관객의 말초적인 영역을 강타하려고만 하는데, 이는 이미지 자체의 시각적 빈곤함이나 구성적 아이디어의 무료함을 숨기기 위해 감행하는 표현이다. 

 

민수: 후자에 속하는 안 좋은 사례로는 이번 전주에서 본 카를로스 카사스의 <크라카타우>라는 영화가 떠오른다.

 

일환: 이미지와 사운드의 관계는 이미지와 언어의 관계만큼이나 민감한 관점에서 사유되어야 한다. 정치의 문제도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이미지와 사운드의 결합을 망설이게 한다거나 부정하게 만드는 잣대로 기능해서는 안 될 것이다. 노이즈 음악가 최준용과 협업한 박병래의 <화포이경>(2014)은 음악과 영화가 교차하는 긍정적인 모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소리가 만들어진다는 감각과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감각이 시간성이라는 맥락 하에 잘 통합되어 있다. 또한 박규재의 <Study for Three Streams>(2024)가 초안에서는 엘레나 라디그의 음악을 사용했었다. 미셸 보카노프스키를 통해서 라디그에게 음악 사용을 공식적으로 허가받고자 했었다던데, 흐지부지되었다고 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허가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지. 나는 해당 영화의 무성 버전도 좋아하지만, 라디그의 음악과 평행적으로 전개되는 초안 역시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영화의 이미지가 음악에 헌사를 남기는 듯한데, 이미지 자체가 온전하게 존재할 수 있기에 구성이 성립한다고 생각했다… 인지용의 <한 선원에 대한 보고>(2024) 또한 고주파 사운드를 활용하는 지점이 있다. 그것은 영화가 지시하는 문학적 세계관의 일원으로 이물감 없이 작동한다. 전자음악을 만들던 그의 경력 덕분일 것이다. 치밀하게 설계되어 있달까.

 

민수: 이장욱과 이민휘의 협업도 빼놓을 수 없겠다. 그들의 협업 과정이 항상 순탄했던 것만은 아닌 듯하지만. (웃음) 이민휘가 전주 영화제 직전에 남긴 후기를 보면, 이장욱 감독이 15분짜리 피아노 곡을 즉흥으로 해달라고 부탁했다더라. 그런데 이민휘는 연주자가 아니라 작곡가라서, 결국 곡을 급히 쓰고 영화제 직전까지 벼락치기로 연습해야 했다고. 하지만 그 연주 상영은 정말 아름다웠다.

 

일환: 그렇다. 그런데 그 이야기까지 시작하면 이 대화는 정말 끝나지 않을 것 같군. (웃음) 이제는 길고 길었던 대화를 마무리할 시점인 듯하다. 이 지면에서 언급하지 못한 뛰어난 작품들과 작가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우리가 정론을 구축하기 위해 글을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우리가 언급해 온 한국 실험영화의 유행은 지금이 그 시작점에 해당한다고 믿고 있다. 이 글 또한 어떠한 서막의 전언처럼 읽어졌으면 한다. 시간과 분량의 제약이 없었다면 더 많은 작업을 소개할 수 있었겠지만… 기회는 이번이 끝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민수: 우리가 매 회차 제안받은 원고 분량의 두 배를 초과해서 썼음에도… 이 글에서 미처 말하지 못한 이름들은 아직 남아 있다. 또 앞으로 만들어질 영화들은 우리가 지금은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이 대화를 갱신할 것이고.

 

일환: 짧지 않은 분량의 글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결국 여기까지 도달하게 된 것 같다. 나는 우선 신작을 잘 마무리하는 일에 이제 열중할 계획이다. 이 글을 어떻게 닫아야 하지? 나보다는 베테랑이지 않나, 아이디어를 제안해 달라.

 

민수: 그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도가 적당하려나? 지금이 정말 유행의 시작이라면 나머지는 극장과 영화가 알아서 이어가도록 두자. 또 우리는 곧 7월 4일 극장에서 만나 이야기하게 될 테니…